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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Mar 31. 2022

나는 K에게 여행을 빚졌다.

22.03.31

목정원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었다. ‘장르를 빚졌다’는 표현을 담은 한 문단을 읽고 나는 누구에게, 어떤 장르를 빚졌을까? 생각에 빠졌다.


한 장르를 한 사람에게 빚질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는 동안 사람에게 빚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처음 맛보게 해 준 과일을 철마다 찾아 먹고, 누군가 들려준 문장을 슬픔의 어귀마다 만져보는 일. 나를 이루는 것들은 모두, 한 시절 매우 고유한 방식으로 내 삶에 도래했다가 대개는 흔한 방식으로 멀어진, 구체적으로 아름다웠던 한 사람 한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이 준 것이 하나의 장르 전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일이나 시 자체일 수도. 이 사실을 잊고 살기는 쉽지만 특별히 잊히지 않는 몇 경우가 있는 법이다. 나는 장 끌로드 아저씨에게 오페라를 빚졌다.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나는 중학교 친구인 K에게 여행을 빚졌다.


 여행은 장소와 사람과 시간이 모두 뒤엉켜 섞인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내는 장르임에 틀림없다. 서점에 따로 마련된 여행 코너에 가보면 여행 정보를 담은 책뿐만 아니라 여행기는 끝없이 쓰인다. 여행은 각자의 방식대로 한 지역 혹은 나라를 알아가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양한 여행법이 있다. 똑같이 파리를 다녀왔어도 여행자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행 에세이를 읽으면 다녀왔던 여행지라도 새로운 곳을 다시 보는듯하다.

나의 첫 해외여행 장소는 일본이다. 대부분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이 거치는  H투어의 도깨비 패키지를 골랐다. 관광지 선택은 자유, 비행기 티켓과 숙소만 잡아주는 패키지였다. 도깨비라는 이름대로 밤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해 새벽 4-5시부터 일정을 시작하는 패키지다. 첫 여행이라는 이유로 선명하게 기억하는 것인지, 여행사를 끼고 여행하는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깨달음 때문인지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난다. 피곤하고 배고프고 졸린 채로 쇼핑몰을 도는 여행이었다. 그 이후로 여행사를 통한 여행은 계획에 넣지도 않았다. (신혼여행은 투어상품을 이용했지만) 주로 인터파크에서 비행기 티켓만 사고 모든 숙소는 검색을 통해 알아보고 떠나는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대학시절 떠난 여행은 모두 스스로 계획해서 다녀왔다. 사촌이 워킹홀리데이를 하고 있는 호주에서 한 달을 보냈고, 대학 동기들과 배낭을 메고 델리를 거쳐 북인도를 향해가는 인도 여행을 한 달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두 나라 안에서 가보고 싶은 곳을 골라 내키는 대로 머무는 유럽여행을 했다.

 나의 여행 방식을 잘 아는 중학교 친구 K와 여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나는 취직을 했고, K는 로스쿨을 마치고 변호사 시험을 치렀다. 바쁘게 달려온 K는 스스로에게 주는 휴가 차원에서 여행을 떠나고 싶다 했다. 우리가 정한 여행지는 필리핀이다. 필리핀으로 정한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에서 가깝고, 가격도 비싸지 않았고, 여름의 나라였다. 단순히 정했던 여행지인 필리핀은 여행 후 특별한 나라가 되었다. 나에게 K와 함께 한 여행은 여행이라는 장르를 나만의 스타일로 굳건히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K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 전의 배낭여행은 유명 관광지에 의존해서 다녔다. 여행지의 특성상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K와 나는 론리플래닛을 펼쳤다. 보통의 여행 책자와 다르게 론리플래닛은 사진은 거의 없는 여행 책이다. 추천 숙소와 맛집은 단 몇 줄로 소개되어 있다. 그간 봐왔던 백배 즐기기 여행책과 다르게 론리플래닛은 성경이나 사전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단 몇 줄에 의존해 어떤 지역을 갈지 결정했다. 짧은 몇 문장의 소개로 한가득 기대를 안고 그곳으로 가면 그 문장이 왜 그렇게 쓰였는지,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구나, 감탄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우리가 론리플래닛에서 찾아 여행지로 삼은 곳은 네이버 블로그에 여행 후기가 거의 없었다. 구글링의 정보도 역부족이었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 우리가 여행했던 필리핀 지역 이름을 검색해보면 지진 소식으로 뒤덮여 있다. 우리만이 갈 수 있는 루트로 짠 필리핀 여행은 성공적이었고, 필리핀 추억을 껴안고 살다 K와 다시 한번 캄보디아 여행을 계획했다.

25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몇 문장에 의존해 갈 곳을 설계하고 느슨하게 하루를 누리는 여행은 K와 나의 여행법이 되었다.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밤은 언제나 맥주와 함께였다. 일정이 조금 어긋나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것도 여행의 일부라 받아들이고 맥주를 들이켰다. 론리플래닛을 펼쳐 짧은 문장에 의존해 어디로 갈지 그날 밤에 정했다. K는 언제나 모험을 즐겼고 나는 K 덕분에 용기를 내서 그 모험에 기꺼이 참여했다.

 캄보디아 여행 다음은 각자의 로드 바이크를 들고 가는 네덜란드 여행이었다. 한국에서 새벽과 밤, 주말을 가릴 것 없이 반포 한강공원과 팔당, 남산을 달리던 K와 나는 네덜란드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면 어떨까 웃으며 이야기했는데 진짜 계획을 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K가 하자고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해외에서 자전거 여행이라니. 내 몸채 만한 자전거를 택배 상자에 넣어 비행기에 싣고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는 여행을 지금 다시 하라 그러면 못할 것 같다.(늙기도 했고, 이젠 무릎도 아프다) 네덜란드 여행은 자전거로 하는 특별한 여행이라 론리플래닛보다는 자전거가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자전거 닿는 대로 숙소를 찾고 끼니를 해결했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가는 유명 관광지를 중심으로 다니는 여행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다음 여행지는 미국이었다. 미국에서 우리는 요세미티 공원 안에 있는 에어비앤비에 머물며 며칠 동안 워킹을 했고 숏코스로 요세미티 정상을 등반했다. 밤마다 쏟아지는 별을 보며 고기를 구워 먹고 맥주를 마시던 시간은 잊을 수 없다.

 K는 로펌회사에서 일하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남편과 함께 하버드로 유학을 갔다. 나는 그 사이 결혼을 해 아이를 낳았다. 우리가 다음에 함께 여행할 곳과 시간은 기약이 없지만, K와 내가 만든 여행의 장르는 어떤 책에도 쓰여있지 않은 루트를 가지고 있다. K덕분에 여행의 장르를 나만의 것으로 쓸 수 있다. 나는 K에게 여행을 빚졌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그 당시 여행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름다움은 머리와 가슴에 충분히 붙들어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옅은 기억과 단편적인 풍경이 남아 있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여행지의 장면은 나를 일으켜 세울 때가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장면과 생각들을 기록해두었다면 어땠을까, 글로 남겨 두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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