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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ish Mar 30. 2022

상상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

22.03.29

 어떤 책이 좋은 그림책일까? 4년 전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 읽어줄 그림책을 고르면서 계속 답을 찾았던 질문이다. 그때는 그림책의 글을 빌려 어른의 입장에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책들을 골라 읽어줬다.  ‘A가 밥을 잘 먹었으면 좋겠는데, 편식을 고치는 이야기는 없나?’ 하고 지니비니 시리즈인 <밥 한 그릇 뚝딱!>을 골랐다. ‘B가 발표하는데 자신감이 없는데, 발표를 잘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틀려도 괜찮아>를 골라 읽어줬다. 잔소리하고 싶은데, 매일 같은 말만 하면 지겨우니까 그림책을 빌려 우회적으로 말해보자고 생각했다. 이런 의도가 담긴 그림책을 읽어줬으니 학부모님들도 교과 및 생활지도 연계된 거라 생각하시겠지, 하고 안심했다. 그러나 그림책을 공부하고, 고르는 과정 속에서 깨닫게 된 내 기준의 좋은 그림책은 교훈적인 내용을 일러주는 책과 거리가 조금 생겼다. (그런 그림책이 나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깨달은 좋은 그림책이란,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중심인 책이었다.  아이의 입장에서 몰입할 수 있는지, 아이가 마음껏 상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놀 수 있는지, 이다. 이를 확고하게 심어준 것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시공주니어, 개정판 2016년)를 펼치면 나오는 그림책 저자 모리스 샌닥의 소개글이다.


샌닥의 책에는 어른들의 눈으로 꿰어 맞춘 어린이가 아니라, 살아 숨 쉬고 제 나이만큼의 생각과 고민을 가진 ‘진짜 아이들’이 등장한다. 칼데콧 상 시상식에서 샌닥은 이렇게 말했다. “어린이의 갈등이나 고통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허식의 세계를 그린 책은 자신의 어릴 때의 경험을 생각해 낼 수 없는 사람들이 꾸며 내는 것이다. 그렇게 꾸민 이야기는 어린이의 생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괴물들이 사는 나라> 모리스 샌닥, 소개글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구글링 해서 찾은 모리스 샌닥의 칼데콧 수상 소감 전문을 읽고 나서는 그림책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행동을 바라보는 각도가 조금 달라졌다. 검색으로 알게 된 사실은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1963년 출간되었을 당시 미국의 교육학자, 어린이 심리학의 권위자들은 괴상망측한 괴물들과 말 안 듣는 아이가 나오는 책이라며 예쁘고 귀여운 어린이의 세계를 망쳐놨다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책의 첫 장부터 세 번째 장까지 나오는 내용으로 어른들의 비난을 산 부분이다. <괴물이 사는 나라> 속 주인공 맥스는 장난꾸러기다. 그런 맥스에게 엄마는 “이 괴물 딱지 같은 녀석!”라고 소리친다. 맥스는 지지 않고 말한다. “그럼, 내가 엄마를 잡아먹어 버릴 거야!”  사실 나도 처음에 읽었을 때  ‘엄마를 잡아먹어버릴 거야’라고 하는 표현을 불편하게 느꼈다. 다시 <괴물들이 사는 나라>가 정말 좋은 책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건, 우리 집 아이가 나에게 한 말 때문이다.

 요즘 32개월의 아이는 “00을 때리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00의 안에는 주로 엄마, 아빠가 들어간다. 처음에 아이가 하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누구를 때리겠다니! 아이가 정말로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때리는 시늉을 했다면 더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대신 그럴 때마다 아이를 붙잡고 “왜 때리고 싶을까?”를 물어봤다. 자신의 감정과 그 이유를 명확히 이어 설명하기는 아직 어려운 나이라 전후 상황과 아이의 말을 추리해 보니 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할 때 “때리고 싶다.”라고 표현하는 것 같았다. 지금 아이의 지상 최대 관심사는 놀이이다. 놀고 있으면서 놀고 싶어 하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서 한 입 먹고 내려가서 놀이를 하고 돌아온다. 양치하기 싫은 이유도, 목욕하기 싫은 이유도, 어린이집 가기 싫은 이유도, 지금 하고 있는 놀이를 이어하고 싶어서다. 놀이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아이에게 마음대로 놀이하지 못하게 하는 엄마, 아빠, 선생님이 얼마나 귀찮고 미울까.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놀고 싶은 마음을 방해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들렸다. 아이가 하는 말을 몇 번 듣다 보니 맥스가 떠올랐던 것이다. 맥스가 외친 말은 정말로 ‘엄마를 잡아먹어 버리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집 아이가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맥스의 상상 속에 함께 흠뻑 빠져 책을 끝까지 읽으면 맥스는 엄마를 매우 사랑하는 걸 알 수 있다. 아이는 자기가 만든 상상의 세계인 괴물 나라 왕이 되어 포악함을 발산한다. 마음껏 호통치고, 마법을 부려 괴물을 장악하고, 춤을 추고, 숲을 탐험한다. 현실에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이들은 상상 속에서 해낸다. 배고픔도 잊고 현실에 가로막힌 마음을 털어내고 나면 머나먼 세계 저편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를 그리워한다. 다시 현실로 돌아올 힘을 기른 것이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주는 것은 그림책만 할 수 있는 멋진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아이도 엄마, 아빠를 때리고 싶은 그 마음을 상상의 세계에서 풀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엄마는 맛있는 저녁을 해둘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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