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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희 Aug 03. 2022

여름휴가

시간이 느리게 흘렀으면 좋겠다.

10일의 긴 여름휴가가 시작되었다. 한 달여 간의 긴 장마가 얼추 끝이 났고, 더위에 지쳐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던 진행형도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무더위는 생각보다 더 무더웠다. 14L 제습기의 물은 금방 차오르고 에어컨을 잠시 꺼두기만 하면 열기가 방안을 온통 뒤덮었다. 보통 크기의 선풍기 2대와 책상 위에 작은 선풍기는 종일 윙윙 돌아갔다. 여름엔 집안에 울리는 소음이 잠잠한 날이 없는 듯하다.



6시 반에 항상 울리던 알람을 꺼두었는데도 6시 25분에 눈이 떠져 화장실로 가는 나는 벽시계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몸은 여전히 휴가에 들어서지 않았다. 다시 이불속으로 누워 조금 뒤척이고는 2차 잠을 잔다. 주5일 게으른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주말의 늦잠과 여유다. 토·일이 주는 그 이틀의 행복을 위해 배가 되는 나날들에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 봄, 가을엔 날이 좋아 회사에 갇혀 있는 게 서글펐다면 여름과 겨울엔 회사에 가기까지가 일단 진이 빠진다. 그래도 나는 말한다.



"여름은 싫어. 차라리 겨울이 나아"



4계절 중 가장 싫어하는 건 계절이 아니라 계절이 주는 환경이다. 나는 습도를 가장 싫어하고, 눈과 비를 그다음으로 싫어한다. 습도를 가장 싫어하는 이유는 찝찝함도 있지만 내 머리카락 때문이다. 나는 곱슬머리이다. 태어날 때부터 곱슬머리였는데 이 곱슬머리는 온도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다. 아침에 기를 쓰고 피어댄 머리카락은 현관을 나서는 순간 슬금슬금 기어 올라온다. 그게 가장 심한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그리고 여름을 싫어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벌레다. 벌레를 극도로 싫어하는 탓에 산에도 잘 가지 않는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근데 참 어긋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나는 여름의 푸르른 나무를 사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데 습도와 벌레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늘 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싫어하는 눈과 비. 비는 젖어서 싫고 눈은 미끄러워서 싫다. 이유는 그저 단순하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은 누구를 만나지도 않고 눈이 덮인 스키장은 가고 싶지도 않다. 창밖으로 볼 때만 아름다운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무더위가 시작되고 냉장고에 든 차가운 보리차와 선풍기는 늘 내 옆에 있다. 입맛이 조금 떨어지긴 해도 3끼를 꼬박 챙겨 먹으며 여름이면 찾는 수박을 후식으로 먹는다.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게 귀찮으면서도 그 수분감 가득한 달콤함을 포기할 수가 없다. 언젠가 태국에 가서 땡 모반을 알게 되었다. 땡모반은 수박 주스인데 더운 나라에서 난 수박이어서 그런지 더 달콤하고 맛있었다. 그래서 태국에 있는 동안 식사를 시키면 항상 땡모반을 함께 주문했다. 그러나 역시 한국에서는 삼각형 모양으로 썬 수박을 들고 우걱우걱 씹어삼키는 맛이 있다.



수박하니 생각난 건데, 같이 밥을 먹으러 가면 오이를 못 먹는 사람을 종종 만나곤 한다. 짜장면에 올려진 오이나, 김밥에 들어간 오이나, 반찬으로 잘려져 나온 생오이를 덜어내거나 멀리 치워버리는 행동을 보면 알면서도 물어보곤 했다. "오이 싫어하세요?" "네. 오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요." "왜요?" "오이 향이 싫어서요"



보통 오이 향이 싫어서 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알게 된 사실은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 대부분이 수박과 참외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리고 미역국을 못 먹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식감이 미끄덩거려 못 먹는다기에 그럼 가지나 굴은 드세요? 라고 물었더니 가지와 굴도 못 먹는다고 했다. 어쩐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들을 함께 싫어하고 못 먹는 것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생일날 미역국을 못 먹는다는 소리는 좀 안타까웠지만.



한 줌의 그늘 이라도 찾아 애쓰며 걸어가다 보니 거리가 조용하다. 햇살이 반짝거리고 나무가 푸르러도 뙤약볕의 길거리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거리를 보면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싶다. 산이나 바다 아니면 에어컨이 빵빵한 종합쇼핑센터 같은 곳에 갔을까. 아니면 나처럼 집안에서 OTT로 결제한 영화를 보며 치킨이나 뜯고 있는 걸까.



뜨거운 여름을 만끽 하기란 나에게 어려운 일이지만, 여름이 좋은 이유도 있다.



차가운 마이불 위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맞는 것과 짧고 얇아진 옷으로 팔을 걷지 않고 세수를 하는 것.

낮이 길어져 8시에도 하늘색을 볼 수 있다는 것(난 하늘색이 보이는 밤하늘이 좋다.),

그리고 초록 잎 무성한 나무와 이 달콤한 휴식, 여름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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