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도, 개도, 수영은 수영

by 수연

이제 정말 한 여름이다.

한여름, 힘든 학교생활 속 작은 즐거움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50원짜리 깐돌이와 봉숭아맛 하드(아이스크림)다. 지루한 수업을 마치고 땀을 흘리면서도, 이 아이스크림 하나면 힘이 난다.

조금씩 녹여 먹어도 10분도 안 돼 없어지지만 말이다.

오늘은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수경상회로 발걸음을 옮겨 하드 하나를 얼른 잡고, 삼그레이 친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신나게 달려가곤 간다.


수경상회는 정문 바로 앞에 있는 문방구 겸 우리들의 간식 창고였다. 문구보다는 대부분 군것질거리를 더 많이 파는 곳이었으며, 조금 떨어진 딸랑이네에서는 문구를 구입하곤 했다. 우리가 졸업하고도 족히 20년은 더 그 자리에 그 간판을 걸고 존재했었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없어 폐교 직전인 상황이지만 가끔 그 자리를 지나갈 때면 문득문득 그때 먹던 불량식품이 혀끝에 남아 있을 만큼 열심히 즐겼었다.


온갖 색소와 인공 향료만 가득했지만, 그 시절의 맛과 즐거움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선명하다.


어김없이 아이들 모두 손에 하드 하나씩 들고, 오늘도 걷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종류는 달라지지만, 그마저도 없는 날엔 아쉬움이 많이, 아주 많이 남기에 학교에 나서는 길에 꼭 주머니를 확인하고 나선다.


「엄마.」

「왜 또.」


엄마가 밭으로 나가시기 전에 불러본다.


「100원만.」


엄마는 주머니를 뒤져 겨우 100원짜리 하나를 찾아 손에 쥐어 주셨다.

아침에 평소와 다르게 다정하게 부를 때면, 엄마도 눈치채실 정도로 50원은 나에게 소중했다.

학교 숙제는 건너뛰어도 주머니의 50원은 빼먹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는 벌써 출발 준비를 끝내시고, 나오지 않는 엄마를 밖에서 계속 재촉하신다.


「안 나오나.」

「당신은 상치 우고 있는 거 안 보이니껴.」


밭에 갈 때는 아부지가 재촉하시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엄마가 재촉하신다.

어쨌든 오늘도 든든하다. 이 즐거움도 없다면 정말 학교는 건너뛰고 싶어질 만큼 가기 싫은 곳이다.

사실 국민학교 내내 배우는 즐거움은 없었다.

중학교에 들어와 공부에 전념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기초가 부족한 만큼 요령도 없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존재했다면, 난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학원도 갈 형편이 못 되었으며, 인터넷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철 지난 교과서도 이미 변소의 휴지로 사용되고 말았으니, 다시 돌아가 기초를 다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셈이었다.


어쨌든 나의 최애 간식은 깐돌이, 보석바, 신호등 캔디, 아폴로, 쌀대롱, 새우깡이었다.

간식을 즐겨 먹지 않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없어서 먹지 못했다.

귀하니 더 당긴다는 말처럼 말이다.


군것질도 종류마다 먹는 방법이 달랐는데, 깐돌이는 살살 녹여 가며 구수한 맛을 즐겼고, 보석바는 알알이 박힌 얼음을 녹여 가며 먹었다.

아폴로는 두 손으로 막대를 비벼 따뜻하게 한 다음, 호흡을 가다듬고 두 입술을 오므려 한 번에 “쏙” 입으로 빼내며 달달한 맛을 즐겼다.

신호등 사탕은 3가지 색상으로 된 커다란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한참을 녹여 먹을 수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남자아이들이 주인도 모르는 논으로 향했다.


「뭐 할라고.」

「있어봐.」


길가에 있던 강아지풀을 꺾어 더럽게 입에서 침을 뱉어내어 풀 끝에 묻히는 게 아닌가.


「나 먼저 간다.」


안 봐도 뻔했다. 개구리 낚시를 하려는 것이다.


좀개구리밥이 가득한 논에 침을 묻힌 강아지풀을 벼 가까이 가져가 한참을 기다리다 보면, 정말 드물게 한 마리 정도 잡히는데 그것도 쉽지는 않다.


어쨌든 난 재미도 개구리도 좋아하지 않는 터라 집으로 가는 발길을 멈추진 않았다.


손에 든 깐돌이 하드는 내 입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 보면 어느새 마을 입구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늘 용돈을 받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이 일찍 밭으로 향한 어느 날, 한 번은 엄마 몰래 아버지 코트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마을 회관에서 과자를 사 먹었었다.

“동전 몇 개쯤이야.” 하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날 밤, 나는 엄마한테 눈물이 쏙 빠질 만큼의 매질과 잔소리를 듣고, 무릎 꿇고 손을 들고 한참을 혼났다. 아픈 것보다 기분이 훨씬 좋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날 이후로 부모님 물건이나 돈에 손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걸 어떻게 아셨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동전 다 합쳐야 500원도 안 되었던 것 같은데…

사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번 한 번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게 교육이었을까 싶다.


비슷한 일은 한 번 더 있었다.

학교가 싫었던 나는 그날 오전 수업만 듣고,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해 집으로 일찍 돌아왔다.

엄마에게 말하고 방에서 잔다고 들어갔는데, 텔레비전을 보며 웃고 즐거워하는 나를 본 엄마는, 내가 아프지 않다는 걸 금세 눈치채셨다.

이모가 와 계신 것도 잊은 채 마당에서 콩을 터시다 말고, 방으로 들어와 콩 털던 그 막대 그대로 매를 드셨고, 거기에 모진 잔소리까지 더하셨다.


이모에게 창피한 것보다, 나 자신이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이후 나는 정말 아파 쓰러질 것 같아도 조퇴는 하지 않았다.


어쨌든 두 사건 모두, 매번 듣던 엄마의 잔소리와는 달랐으며, 마음 한켠에 깊이 남은 불쾌한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았다.


「오늘 갯소 갈거재.」

「당연히 가야재, 더워 죽겠다.」


벌써 몇 일째 갯소에서 수영만 하고 한나절을 보냈다.

마을에는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세 곳 정도 있었다.


마을 가장 위쪽 산을 둘러싸고 있는 ‘폭포’는 해터로 올라가기 전, 정확히 마을이 끝나는 지점, 산과 계곡이 만나는 곳에 있었다. 10m 정도 높이에서 물이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폭포를 이루었다.

물줄기는 바위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물 위로 떨어졌고, 그 쏟아지는 소리에 겁이 나 가까이 가지도 못했던 것 같다. 폭은 좁았지만, 수심은 내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오빠는 자주 여기서 수영을 했지만, 어린 우리들은 그 폭포에서 떨어져 내려온 계곡 바로 아래 ‘갯소’에서 수영을 즐기곤 했다.

폭포의 물이 그대로 흘러내려 조용한 계곡을 이루었고, 수심은 내 키만 했으며, 넓이는 10명은 족히 함께 수영할 수 있는 곳이었다.

큰 바위로 둘러싸여 다이빙도 가능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끼 낀 바위에서는 미끄럼도 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만한 놀이터가 또 있을까 싶다. 자연이 만들어 준, 그대로의 풀장이었다.

갯소는 그렇게 산과 계곡, 그리고 과수원으로 둘러싸인, 보이지 않는 보물 같은 우리의 한여름 놀이터였다.


내가 알고 있는 해터, 아니 그 위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개울을 이루고 이어 계곡으로 흘렀다. 폭포처럼 센 물줄기 끝에는 다시 고요한 우리만의 수영장이 만들어졌다.


한여름에도 오랜 시간 물속에 있다 보면 한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는 바위 위로 올라가 햇볕을 쬐면 금세 온몸이 녹아들었다. 그렇게 반복해서 놀다 보면 어느새 한나절이 지나갔다.

마을 아이들 대부분이 갯소에서 한여름을 보냈을 정도였다.

폭포에서 내려온 바위에 이끼로 미끄럼을 타고, 계곡 주위로 둘러싸인 큰 바위에서 일광욕을 즐겼다.


그다음이 물반소인데, 이곳은 수영을 즐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을 초입에 있기도 했고, 밭과 너무 가까워 지나가는 이들이 많아 수영보다는 버들치와 피래미 잡는 일이 더 많았던 곳이다.

갯소에도 버들치는 많았지만, 워낙 아이들이 많아 사발 무지 놓기에는 적절하지 못했다. 고기가 모여들 새도 없이 아이들이 오갔으니 말이다.


약속 시간은 따로 없었다.

햇볕이 가장 뜨거울 때, 수영복도 없이 수건 한 장 달랑 들고 갯소로 향했다.


어딜 가든 풀들 천지니, 손도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바랭이풀을 꺾어 윗부분의 여러 개로 갈라진 가지를 4개~5개 정도만 남기고 꺾어 줄기에 맞대어 준다.

그리고 줄기에 꺾은 가지를 잘 묶어주면 우산이 만들어지는데, 위아래로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는 식으로 몇 번 손을 놀리다 이내 그대로 땅에 버려진다.


지천에 풀은 깔렸으니 만들었다 버렸다를 반복한다.


갯소입구에서부터 물 내음과 함께 어느새 수영을 즐기거나 바위로 올라가 쉬고 있는 아이들 천지였다.

흐르는 물소리와 첨벙 대는 아이들 소리, 여름의 풀벌레 소리와 매미 소리가 전부였다.


동생과 나는 수영 준비를 한다.

먼저 귀에 넣을 말린 쑥잎을 찾아본다. 진짜 쑥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라비틀어진 쑥잎을 비벼 귀에 넣고 수영을 했다.

귀마개 대용이긴 했지만, 물이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외부 소리와 바람은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었던 민간요법인 셈이었다.

어쨌든, 마른 잎을 귀에 맞게 뭉쳐 넣어본다.

그리고 들어가기 전 팔과 다리, 몸에 물을 뿌려가며, 입은 옷 그대로 물속으로 조심히 들어가 수영을 시작해 본다.


우리 동네에서는 물에 뜨면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했다.

개구리가 됐건 개가 됐건, 수영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수영을 할 줄 안다고 말한다.

두 팔은 좌우로 계속 움직여주고, 무릎 아래 두 다리는 위아래로 움직여 주면 앞으로 나가기는 하니까…

말 그대로 첨벙첨벙 대다 보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다리의 움직임으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었으며, 팔을 어떻게 움직이냐에 따라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문제는, 팔보다 다리의 힘이 부족해 오래 수면 위로 떠 있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수면 위에서 노는 것보다 잠수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맑은 물속에서 조심스럽게 눈을 뜨면, 물아래 쌓인 모래와 돌들이 물결의 이글거림에 따라 다르게 보였다.

버들치가 당황하는 모습도 그대로 볼 수 있으니, 수영보다는 잠수가 자연스럽게 일상이 되었다.


숨을 참는 시간도, 여름 막바지가 되면 나도 모르게 점점 길어졌다.


「간다.」


바위 위로 올라가 다이빙 준비를 한다.

팔을 위아래로 흔들고 상체를 숙여 물속으로 뛰어들 마음의 준비를 한다.


「하나, 둘, 셋 간다.」


소리에 근처에 있던 아이들도 방향을 바꿔 수영한다. 부딪치지 않으려 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물 위에서, 물속에서 헤엄치다 보니 어느새 한기가 느껴지고 입술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 추워, 니 안 춥나.」

「나 올라가서 좀 쉴게.」

「나도 같이 가.」


동생이 뒤를 따른다.

귀에 넣었던 쑥잎을 빼고 바위에 누웠다. 햇볕이 온몸을 감싸 주니 금세 따뜻해졌지만, 귀에 물이 들어간 탓인지 주변 소리가 또렷하게 들리진 않았다.

일어나 두 발로 콩콩 뛰어 본다. 그제야 귀속 물이 “뻥” 하는 소리와 함께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원함과 해방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때 바위 옆 물봉선이 눈에 띈다.

물가에 핀 꽃, “나를 건드리지 마라”의 뜻이 있다지만 그대로 따서 입으로 넣어 버린다.

다 먹는 건 아니지만 달콤한 맛을 느끼고 동시에 뱉어 버리기 일쑤였다.


여름 한철 물놀이를 즐기다 보면, 귀에 염증이 생겨 가끔 고름이 나오기도 했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 아이들이 겪는 문제였을 것이다. 물론 우리 집 오빠,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면 엄마가 귀에 약을 떨어뜨려 주셨지만, 약효가 발휘될 즈음 또다시 물속으로 뛰어드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름 내내 귀 문제는 계속되었다.


「여와 누워봐.」

「고름 나오나?」

「나온다 가시나야. 우째 맨날 들어가노.」

「재미있으니까.」


햇볕이 뜨거운 날, 마루에 앉아 엄마 무릎에 귀를 대고 누웠다.

엄마가 떨어 주시는 약 한 방울은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것처럼 시원했다.

하지만 이때뿐이었다.

귀에서 고름이 나오거나 말거나 그렇게 여름이 끝날 때까지 수영을 멈추지 못했으니, 즐거움이 불편함을 이겼다고 해도 될까 싶다.


여름이면 귀 때문에 고생이었지만, 겨울엔 동상으로 또 고생했다.

갯소는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썰매 타기와 얼음낚시를 하기 좋은 곳이었다.

어느 날 오빠는 갯소에서 친구들과 얼음을 깨고, 얼음배를 타다가 빠지는 바람에 온몸이 꽁꽁 언 채로 몰래 집에 들어와 혼났던 기억이 있다.

아무리 작은 계곡이었어도 한겨울 아닌가?

엄마의 걱정을 알기에 오빠도 몰래 숨기려 했을 것이다.


그날 저녁은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주셨다.

감자와 김치, 파를 넣고 항상 마지막에는 찬밥을 말아먹었던 기억이 있다.

벼농사를 지어서 그런가 어른들은 뭘 먹든 쌀밥을 빼놓진 않았던 것 같다.

한여름엔 시원한 수돗물에 밥을 말아, 고추와 된장만 있어도 한 끼 해결은 되었다.


「밥상피라.」

「야, 일나(일어놔).」


방 안에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가족 모두 엄마 말 한마디에 바쁘게 움직이며,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이때 엉덩이를 들지 않으면 한소리 또 들으니, 할 일이 없어도 엉덩이를 떼고 무엇을 하든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밥상을 펴고, 김치와 먹다 남은 반찬을 상에 올리고 식구들 수만큼 숟가락과 젓가락도 밥상 위에 놓는다. 가족들 모두 마지막에 들어올 라면을 기다리고 있다.


식구 수에 맞춰 가져온 빈 쇠그릇이 준비되고, 밥솥에 넣고 끓인 라면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엄마는 국자로 식구 수만큼 쇠그릇 가득 라면을 담아 주셨다.

라면의 스프 맛보다 감자와 김치 맛이 더한, 걸쭉한 라면이었다.

이 간단한 식사도 어김없이 울엄마는 마지막으로 식사를 끝내신다.


엄마는 우리 집의 유일한 개띠셨다.

가리시는 거 없이 뭐든 잘 드셨다.

식구들이 먹다 남긴 음식은 모두 엄마 차지였으며, 유독 좋아하신 음식도 싫어하시는 음식도 딱히 없으셨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엄마를 유심히 살펴보시다 끝내 놀리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 얼굴에는 웃음기와 장난기 가득 엄마를 놀리시기 시작하신다.


「저 봐라 저봐, 개띠라서 못 먹는 게 없다.」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끝까지 식사를 하시곤 하셨다.


어린 내가 제일 신기했던 건 바로 엄마의 생선 가시 발라내는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육류, 특히 비계 부위를 좋아하셨고, 엄마는 어류 종류를 좋아하셨는데, 손으로 대충 가시를 제거한 후 생선을 통째로 입 안에 넣으신 다음, 오물오물 몇 번 하다 보면 신기하게 어느새 가시만 입 밖으로 쏙쏙 빼내셨다.

내가 가시 때문에 남긴 부위도, 가족이 먹지 않던 생선 대가리도 엄마의 입으로만 들어가면 모두 발라져 가시만 입 밖으로 나오니, 신기하고 또 신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저녁상을 물리고 오랜만의 가족들이 텔레비전 앞에 모였다.

아버지는 담배 한 개를 태우고 계셨고, 그런 나는 아부지 무릎에 앉아 담배 연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시간을 즐겼다. 그 어떤 소파보다 편했다.


아버지는 위가 좋지 않아 술은 하지 않으셨지만, 유일한 기호식품인 담배는 시간이 나실 때마다 입에 물고 계셨다.

물끄러미 무릎 위의 나를 한참 내려다보시던 아버지가 한마디 하셨다.


「아이구 못생겼데이. 누구 닮아서 이래 못생겼노.」

「아부지, 닯아서 왜?」

「내가 이래 생겼나.」


이번에는 내가 타깃이 되었다.


「 이 코 큰 거 좀 봐라, 눈도 쓸데없이 크고, 입은 어디까지 찢어지노.」


매번 있는 일이라 타격은 없다. 자기 자신을 그대로 닮은 나를 볼 때면 무슨 생각을 하실까?

외모로만 판단한다면 100% 난 아부지였다. 엄마의 유전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난 아부지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울엄마의 또 다른 신기한 점, 바로 잠버릇이었다.

머리가 베게에 닺고 몇 초 후면 엄마는 깊은 잠에 빠져드셨다.

정말, 누군가 마법을 건 것처럼.

그런 엄마를 이번에는 나와 동생이 옆에서 또 괴롭힌다.


「엄마 자?」

「진짜 신기해, 눕자마자 자.」

「엄마, 엄마 밖에 누가 왔어.」


손을 잡아당겨도 보고, 팔을 꼬집어도 보고, 꼬불꼬불 짧은 파마머리를 잡아당겨도 보지만 엄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신다.

이 장난을 넘겨야 우리가 포기하는 걸 아셨기에, 엄마는 두 눈을 강제로 감고 잠에 빠져드신다. 아프셨을 텐데도 잠을 위해 참아내신다.

이내 재미가 없어진 우리는 엄마를 놔주지만,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든다는 옛말은 울엄마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늘 고된 하루를 보내시던 분이니, 그 잠이 얼마나 달콤한 휴식이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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