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스의 반찬가게: 김치 대신 올리브와 하리사

by 야간비행

1. 해외살이의 제1원칙: 잘 먹어야 버틴다


누구에게나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지만, 해외살이 중 먹는 문제는 그야말로 '생존 투쟁'이다. 4년째 해외를 방랑하며 어느 정도 익숙해지긴 했지만, 나라가 바뀔 때마다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식당과 마트를 뒤지며 새로운 생존 전략을 세워야 한다. 오랜 기간 건강하게 방랑하려면 운동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이 '균형 잡힌 식사'다. 70대의 나이, 매일 단백질과 야채를 챙겨 먹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다.


물론 돈이 많다면 매일 스테이크를 썰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금방 파산이다. 한정된 생활비 내에서 골고루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 나는 매일 '가성비' 좋은 음식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아침은 간단하다. 한국에서 공수해 온 누룽지를 끓이고 전날 마트에서 사 온 과일, 계란, 요플레 등으로 해결한다. 문제는 점심과 저녁이다. 하루 한 끼는 반드시 단백질이 포함된 묵직한 식사를 해야 하는데, 이 메뉴 선정이 매일의 숙제다.

KakaoTalk_20260124_044213727_03.jpg 마트 과일코너의 탐스러운 오렌지: 당도가 기가 막히다

2. 카이로의 맛집, 그리고 튀니스의 마트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이 숙제가 꽤 쉬웠다. 집 근처에 단돈 만 원 정도면 훌륭한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는 가성비 식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이 줄을 서는 맛집이라 6시가 넘으면 자리가 없었다. 나는 매일 5시쯤 느긋하게 가서 자리를 잡고, 창밖으로 히잡을 쓴 현지인들이 길게 늘어선 대기 줄을 보며 흐뭇하게 식사를 즐기곤 했다. 히잡 쓴 여인들이 내가 나가기를 눈 빠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서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튀니스는 카이로에 비해 인구도 적고 관광객도 적어서인지, 집 주변에 마땅히 갈 만한 식당이 보이지 않는다. 고급 프랑스 레스토랑이 한 곳 있었지만 매일 스테이크를 먹을 수도 없고, 단백질 보충이 난관에 봉착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집 앞의 대형 마트였다. 한국의 이마트처럼 잘 정돈된 식품 코너에는 고맙게도 전기구이 통닭을 비롯해 다양한 단백질원을 팔고 있다. "그래, 비싼 식당 대신 마트 통닭이다." 그런데 통닭 옆에서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형형색색의 반찬들이 잘 진열되어 있는 '절임 음식 코너'였다.


3. 유레카! 튀니지에서 만난 '한국의 맛'

그곳은 영락없는 한국 재래시장의 반찬가게였다. 20~30여 가지의 각종 절임 음식이 진열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니 익숙한 비주얼들이 눈에 띈다. 고추를 절인 것은 우리의 '고추장아찌'와 흡사하고, '마늘장아찌'도 보인다. 올리브는 초록색, 검은색, 보라색 등 대여섯 가지나 된다. 심지어 멸치젓(앤초비) 비슷한 것도 보이고, 붉은 고추장(하리사) 같은 양념도 보인다.


혹시나 김치를 대신할 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시식을 요청했다. "와우!" 입에 넣는 순간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몇 가지는 정말 훌륭했다. 특히 올리브는 충격적이었다. 한국 레스토랑에서 가끔 구경했던 올리브는 딱딱하고 밍밍해서 무슨 맛으로 먹나 싶었는데, 이곳의 올리브는 부드럽게 씹히면서 짭조름한 감칠맛이 폭발했다.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KakaoTalk_20260124_044213727_01.jpg 마트 반찬코너의 각종 절임반찬: 하나하나가 맛의 예술이다.

고추 절임은 매콤하고 개운해서 김치 대용으로 손색이 없었다. 피클처럼 시큼하기만 한 게 아니라, 한국인의 DNA를 자극하는 '매운맛'과 '짠맛'이 살아있었다. 나는 올리브, 고추 절임, 마늘 등 열 가지 정도를 조금씩 담아왔다. 가격도 기가 막히게 저렴하다. 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위 사진에 보이는 갖가지 반찬을 집어왔다.


4. 누룽지와 올리브, 퓨전의 미학

숙소로 돌아와 끓인 누룽지 한 사발에 마트표 통닭, 그리고 튀니지 반찬들을 곁들였다. 퍽퍽할 수 있는 닭고기에 매콤한 고추 절임을 얹어 먹으니 목 막힘이 싹 사라진다. 구수한 누룽지 위에 짭조름한 튀니지 올리브를 올려 먹는 맛은 또 어떤가. 풍성한 한국반찬에 비해서 손색없는 다양한 맛의 향연이다.


느끼함은 사라지고 입맛이 돈다.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서는 김치가 없으면 울며 겨자 먹기로 오이 피클을 씹곤 했다. 동남아 여행 때도 분명 이런 현지 반찬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왜 '김치 아니면 피클'이라는 고정관념에 갇혀 시도조차 안 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새로 발견한 튀니지의 반찬가게 덕분에 나의 식생활은 한층 고급스럽고 풍요로워졌다.


5. 빵과 올리브, 그리고 역사의 도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르니, 비로소 도시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좀 이른 판단일지 모르지만, 만약 해외 한 곳에서 서너 달 장기 체류를 해야 한다면 이곳 튀니스는 우선순위 상위권이다.


이유는 많다. 첫째, 압도적인 가성비다. 비록 공용 숙소지만 한 달 70만 원, 하루 2만 원 수준이다. 물가 싸기로 유명한 동남아의 라오스와 비슷한 수준이다. 숙소비만 싼 게 아니다. 택시비, 마트에 있는 장바구니 물가가 동남아 수준이다.


둘째, 미식의 수준이다. 100년 가까이 프랑스의 지배를 받은 영향 때문인지, 이곳의 식문화는 프랑스의 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른 팔뚝만 한 바게트 빵이 단돈 500원인데, 그 맛은 파리의 어느 빵집 못지않게 훌륭하다. 치즈와 와인, 각종 식료품의 퀄리티는 유럽급인데 가격은 동남아급이니, 가난한 방랑자에게는 최고의 선택지이다.


셋째, 묘한 분위기다. 저렴하지만 저소득 국가 특유의 남루함이 없다. 도시 곳곳에는 유럽풍의 건물이 즐비하고, 사람들의 외모 또한 아랍보다는 남유럽 사람들에 가깝다. 이슬람 국가지만 종교적 색채가 느슨하여 마트에서 버젓이 술을 팔고, 사람들은 개방적이다. 저렴한 물가, 맛있는 빵, 그리고 자유로운 공기.


넷째, 지중해성 기후가 선사하는 '청명함'과 '쾌적함'이다. 바다라고 다 같은 바다가 아니다. 이곳의 지중해는 습기가 적어 시야가 투명하리만치 깨끗하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바닷가 특유의 끈적함이나 비릿한 짠내도 없다. 마치 거대한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푸른 생명력은 펄떡이는 기묘하고 아름다운 바다다. 이 바닷가를 걷는 기분이 상큼하다.


날씨 또한 한국보다 훨씬 살기 좋다. 봄과 가을은 한국의 가장 좋은 날들처럼 야외 활동을 하기에 최고이다. 많은 이들이 '아프리카의 여름'이라 하면 숨 막히는 더위를 떠올리지만, 이곳은 다르다. 기온은 30도를 웃돌지만 습도가 낮아 그늘에만 들어서면 땀이 식을 만큼 선선하다. 한국의 끈적한 가마솥더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겨울 또한 최저 기온이 영상 7~8도 수준이니, 뼈를 깎는 한국의 혹한에 비하면 양반이다. 비록 부실한 난방 시설 때문에 비 오는 날은 실내에서도 으슬으슬한 한기를 느끼기도 하지만, 전기장판 하나면 충분히 견딜 만하며 날씨 좋은 날은 한국의 봄처럼 편안하다. 일 년 내내 온화하고 쾌적한 이 날씨야말로 은퇴자가 살기에 최적의 환경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는 유럽의 은퇴자들이 많다고 한다.


다섯째, 발길 닿는 곳이 곧 '거대한 역사의 현장'이다. 내 눈앞의 이 푸른 바다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다.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이 제국의 운명을 걸고 격돌했던 '포에니 전쟁'의 무대다. 우리의 통영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의 비장함이 느껴진다면, 이곳 튀니스 앞바다에서는 서양 문명의 물줄기를 바꾼 장엄한 세계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 역사의 무게감이 주는 전율은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세계사의 현장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거나 걷는 것 자체가 가슴 뭉클한 즐거움이다


"테라스 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프랑스 노신사들을 본다. 그들은 프랑스의 높은 세금과 추운 겨울을 피해 이곳 지중해의 품으로 망명을 왔다. 500원짜리 바게트와 따스한 햇살 아래서, 그들은 인생의 황혼을 '우아한 가성비'로 채우고 있다. 4년째 길 위를 떠도는 70대의 나 또한, 이들의 여유를 보며 잠시 튀니스에서의 영주(永住)를 꿈꿔본다."


고작 반찬가게를 찾으러 나갔다가, 나는 튀니스라는 도시의 거대한 진가를 발견하고 말았다. 누룽지와 올리브, 500원짜리 바게트, 그리고 로마의 역사가 흐르는 바다. 이들이 있는 한, 튀니지에서의 삶은 꽤나 우아하고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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