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추억 통장 잔고는 얼마입니까?
1. 4050의 노후 준비 vs 6070의 노후 준비
보통 사람들에게 '노후 준비'가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돈' 이야기를 한다. 4050 세대에게 노후 준비란 퇴직 후 월급이 끊겼을 때를 대비해 연금을 붓고 자산을 불리는 '경제적 생존'을 의미한다. 조금 더 깨어 있는 선각자들은 여기에 '취미'나 '인간관계' 정도를 더한다.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우리 '1차 베이비부머' 세대는 이미 은퇴의 강을 건넜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 경제적 안정을 이룬 친구들은 해외여행을 다니며 '골든 라이프'를 즐기지만, 안타깝게도 절반 이상의 친구들은 아직도 생계를 위해 돋보기를 쓰고 일터로 나간다.
2.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살아야 한다
나이 들었어도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안타까운 6070에게는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이미 은퇴하여 골든 라이프를 보내고 있는 6070 세대는 노후를 어떻게 보내는 게 맞는가? 젊었을 때 열심히 일했듯이, 이제는 열심히 취미 생활하고 봉사 활동하면서 놀기만 하면 되는 걸까? 4050 때 열심히 저축하여 노후준비 마쳤으니 이제부터는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그저 하루하루 즐기다가 늙어가면 그만일까?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84세지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건강 수명'은 73세에 불과하다. 즉, 퇴직 후 뒷산을 매일 걸을 수 있는 '건강한 노후'는 70대 중반, 길어야 80세까지다. 요즘 말로 '재수 없으면' 100살까지 산다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10년 이상을 집안이나 병원에서 옴짝달싹 못 하고 보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한때 건배사로 각광받았던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아프다가 죽는다)'처럼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잠자듯 떠나기를 바라지만, 그런 복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대부분은 상당한 시간을 실내에서 지내야 한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를 대비하여 병원비에 대한 노후 준비는 하지만, 정작 '누워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65세 퇴직 후, '두 번째 노후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 내가 준비하는 것은 건강하지 못하여 실내에서만 지낼 때 꺼내 먹을 '추억 자산'이다.
3. 전문직 친구의 통장과 나의 통장
평생직장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퇴직을 마다하고 70이 넘도록 일하고 있다. 내 주변 전문직 친구들은 지금도 현역에서 뛰며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더 일할 수 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솔직히 이 나이에도 고액 연봉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이 들어서도 일터를 벗어나지 못한 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경제적으로 궁핍하다면 당연히 일을 해야겠지만, 이미 평생 쓰기에 부족하지 않은 노후 자금이 있는데도 여전히 사무실을 오가며 일하는게 맞는 건가? 은행 통장에 돈은 쌓이는지 모르겠는데, '추억 통장'은 언제 채우지?"
지금 우리 나이는 은행 통장의 잔고를 늘릴 때가 아니라, 추억의 두께를 늘려야 할 시기다. 돈이 궁하지도 않으면서 숫자를 늘리느라 인생의 황금 같은 '자유 시간'을 반납하는 것은 어리석은 투자가 아닐까? 일하면서도 추억을 쌓을 수는 있겠지만 추억의 질과 양이 다를 것이다.
4. 요양원에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
몸이 굳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될 때,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식들이 매일 찾아와 주길 바란다면 그건 욕심이고, 나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내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6년을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이건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미래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곳의 노인들은 밥심으로 사는 게 아니라 '추억의 힘'으로 산다. "내가 왕년에..." 하며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낼 때 그들의 눈은 잠시나마 반짝인다. 과거의 회상이 곧 유일한 낙이자 진통제인 셈이다. 현재는 힘들어서 말하기도 싫고 미래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과거만을 먹고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 베이비부머 세대가 '일벌레'로 살아서, 꺼내 먹을 추억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억은 퇴직 후, 아직 다리가 튼튼한 '전반기 노후'에 부지런히 만들어 둬야 한다. 지금 내가 튀니지의 낯선 골목을 헤매고, 이집트의 사막을 건너는 이유는 단순히 지금 즐겁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훗날 꼼짝 못 하게 되었을 때, 머릿속에서 꺼내 먹을 '맛있는 기억의 통조림'을 부지런히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6070 중에도 벌써 과거만을 먹고사는 사람이 있긴 하다. 그들은 몸은 건강하나 '마음은 이미 요양원에 있는 사람들'이다. 6070은 과거를 먹고살아야 할 나이가 아니다. 추억을 쌓아야 할 나이이다.
5. 휠체어 위에서도 할 수 있는 것들
내 남은 여생의 취미이자 업(業)은 여행 작가다. 걷지 못하게 되면 여행 작가는 끝일까? 아니다. 휠체어 위에서도 글은 쓸 수 있다. 밥 숟가락 들 힘만 남아 있다면 나는 노트북을 두드릴 것이다.
그러나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슨 글감을 찾겠는가? 건강할 때 많은 경험을 입력해 두어야, 나중에 몸이 굳었을 때 출력할 글감이 생긴다. 지금 내가 전 세계를 방랑하며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지금의 즐거움을 넘어 훗날 휠체어에 앉았을 때 나의 소중한 글감, 즉 '추억'이 될 것이다.
6. 나의 행복 보약, '디지털 저금통'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사진은 빛바랜 인화지 몇 장이 전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여행 중 수시로 셔터를 누른다. 단순히 풍경만 찍는 게 아니라, 영상에 내 목소리를 담고 내 얼굴을 남긴다. 그리고 여행 중의 경험과 느낌을 글로 남긴다. 이 디지털 데이터들은 추억 통장 잔고이면서 훗날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행복 보약'이다.
나는 이 귀중한 보약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분산 배치한다. 노트북, 대용량 USB, 외장 하드, 그리고 구글 포토(Cloud)까지. 매년 업데이트하고 백업한다. 나이 들어 일하는 친구들이 통장 잔고를 보며 흐뭇해할 때, 나는 내 '추억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을 보며 배가 부르다.
7. AI 로봇에게 내 인생을 학습시키다
조금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앞으로 10년 뒤면 AI(인공지능)와 로봇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요양보호사 대신 똑똑한 AI 로봇이 내 곁을 지킬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멍하니 있는 대신, 내가 평생 모아둔 '사진과 영상, 브런치 글'을 그 로봇에게 입력시킬 것이다. 나의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한 로봇은, 어느새 나와 평생을 함께한 친구처럼 나를 이해해 주지 않을까? "주인님, 2026년 튀니스에서 드셨던 그 500원짜리 바게트, 참 맛있었다고 하셨잖아요." 로봇이 건네는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건강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8. 나는 오늘도 '추억 통장'을 채우러 간다
나는 지금 튀니스의 낯선 카페에 앉아 이 글을 쓴다. 누군가는 나보고 "나이 칠십에 사서 고생한다"고 혀를 찬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단순히 노는 게 아니라, 내 인생 후반전을 위한 가장 확실하고 수익률 높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풍경, 낯선 사람들, 그리고 500원짜리 빵의 맛. 이 모든 것이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나의 노후를 지루하지 않게 해 줄 든든한 자산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4050 때 매달 연금을 부었듯이, 오늘도 걷고, 찍고, 쓰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며 건강이 나빠질 때의 노후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