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에서 마라케시로
1. 모로코의 경주, 붉은 도시 마라케시
모로코의 역사 도시 마라케시는 한국의 경주와 같다. 프랑스 식민지 이전, 사하라 사막을 건너온 '베르베르 왕조(알모라비드 & 알모하드)'가 수백 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제국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가 붉은 흙빛으로 물들어 있어 '붉은 도시(Red City)'라고도 불린다.
카사블랑카에서 고속열차에 몸을 싣고 마라케시로 향했다. 차창 밖 풍경은 내 예상과 달랐다. '이곳이 아프리카 맞아?'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평원은 마치 몽골의 초원을 옮겨 놓은 듯했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으레 황량한 모래사막을 떠올리던 나에게, 한반도보다 넓다는 이 비옥한 곡창지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잡초만 무성한 박토가 아니라 보리와 밀이 자라는 생명력 넘치는 땅. 그런데도 왜 이 나라는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을까? 큰 강이 없어 오로지 하늘만 바라봐야 하는 천수답 농업 탓이란다. 풍요로워 보이는 초록 평원 뒤 남루한 집들의 모습에서 그들의 팍팍한 삶이 스쳐 지나간다.
2. 알라딘의 무대, 야생의 미로 속으로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마라케시에 도착했다. 후진국 관광지에서 택시는 종종 '칼 안 든 강도'로 돌변한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기사와 얼굴 붉히며 흥정하는 것이 싫어, 나는 현지인들 틈에 섞여 만원 버스에 올랐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안, 현지인들이 힐끔거린다. '돈 많은 외국인이 왜 택시를 안 타고 우리 자리를 뺏느냐'는 듯한 눈빛이다. 하지만 그들의 땀 냄새 섞인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여행법이다.
마라케시의 구시가지(메디나)는 2019년 1,200만 관객을 홀렸던 영화 <알라딘> 속 가상 도시 '아그라바'의 실제 모델이다. 서울의 남대문이나 카이로의 시장과 비슷하겠거니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곳엔 아직 아프리카의 '야성'이 살아있다.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달하는 거대한 구역이 붉은 벽돌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천 개가 넘는 미로 같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그 중심인 '제마 엘 프나' 광장에서는 피리 소리에 맞춰 코브라가 춤을 추고, 원숭이가 재주를 부린다. 영화 세트장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 신비로움 속에서도 쓴웃음을 짓게 하는 풍경이 있다. 전통 시장의 기념품 대다수가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아이러니. 게다가 재주 부리는 코브라를 신기해서 쳐다보다가 핸드폰이라도 들라치면, 어디선가 주인이 튀어나와 "돈 내놔!"라며 으름장을 놓는다. 자본주의의 때가 묻은 '천일야화'의 씁쓸한 뒷면이다.
3. 천국을 꿈꾼 천장, 바히아 궁전
구시가지의 또 다른 보석은 '바히아 궁전'이다. 영화 <알라딘> 속 술탄의 궁전에 영감을 줬다는 곳이다. 바닥은 형형색색의 타일(젤리지)로 덮여 있고, 천장은 한국 사찰의 단청처럼 정교한 문양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슬람 건축은 유독 천장에 공을 들인다. 아마도 천장을 신이 계신 하늘, 즉 사후에 가야 할 천국으로 여겼기 때문이리라. 고개를 들어 그 화려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경배를 보는 듯하다.
4. 대형 벽시계와 작은 명품 시계의 차이
2월의 마라케시는 벌써 한낮 기온이 25도를 넘나 든다. 붉은 먼지와 인파에 지칠 무렵, 나는 도심 속 오아시스 '마조렐 정원'으로 향했다. 입장료 170디르함(약 27,000원). 현지 물가를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다. 게다가 콧대 높게 온라인 예약만 받는다. '고작 정원 하나 보는데 이 돈을?' 반신반의하며 들어섰지만, 정원을 한 바퀴, 두 바퀴 돌면서 나는 이 가격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두 달 전 세계 최고라는 브라질 리우의 열대식물원을 가봤다. 여의도 절반 크기의 거대한 면적에 온갖 열대 식물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 아마존에 온듯한 경외심을 느꼈었다. 하지만 마조렐 정원은 작지만 특별함이 있다. 축구장만 한 크기에 야자수와 선인장이 심어져 있을 뿐, 웅장한 폭포도 거목도 없다. 하지만 이것은 '대형 벽시계'와 '작은 명품 시계'의 차이였다. 크기로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과 안목으로 승부한다.
프랑스 화가 마조렐이 만들고, 훗날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이 사들여 완성했다는 이 정원은 '배치(Layout)'의 미학을 보여준다. 옷을 디자인하듯 선인장을 배치하고, 강렬한 코발트블루(마조렐 블루)를 배경색으로 입혀 초록색 식물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평범한 선인장도 명품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으면 예술이 된다는 것을, 이 정원은 침묵 속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듯이 정원의 벤치를 옮겨 다니며 선인장과 야자수의 모습을 음미했다. 조그마한 정원에서 시야에 따라 변하는 수많은 작품을 감상하느라 세 시간이나 머물렀다. 그 완벽한 조화 속에서, 나는 깊은 평온을 만났기 때문이다.
5. 붉은 석양과 타진(Tagine)의 위로
정원을 나와 붉은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루프탑 카페에 앉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도시는 더욱 붉게 타올랐고, 어디선가 '아잔(기도 소리)'이 울려 퍼졌다. 소음 가득하던 광장이 일순간 경건한 배경음악에 잠기는 마법 같은 시간이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모로코 전통 요리 '타진'을 주문했다. 고깔모자처럼 생긴 독특한 질그릇 뚜껑을 열자, 하얀 김과 함께 구수한 향이 피어오른다. 푹 쪄낸 양고기와 채소의 부드러운 맛은 영락없는 한국의 갈비찜이다. 낯선 이국땅, 붉은 석양 아래서 맛보는 익숙한 고향의 맛. 긴장이 풀리며 비로소 여행자의 여유가 찾아온다.
다시 카사블랑카로 돌아가는 기차 안. 안대로 눈을 가렸지만 잔상은 더 선명해진다. 코브라가 춤추던 붉은 광장의 혼돈과, 선인장이 숨 쉬던 파란 정원의 적막. 너무나 다른 두 가지 색깔이 뒤섞여, 마라케시라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