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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Feb 05. 2024

언제 죽는 게 좋을까?

죽은 후 어디로 가며 언제 죽어야 할까?


난 여행 떠나기 전 여행자 보험을 넣고 보험계약서를 아들, 딸에게 보내준다. 혹시 사고 나서 내가 죽기라도 하면 사망보험금을 받으라는 의미이다. 애들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냐며 펄쩍 뛰지만 나는 매번 보내준다. 이번 여행 중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내 직업은 위험도가 무척 높았다. 잊을 만하면 동료, 선후배의 순직 소식을 들어야 했다. 나 역시 죽을뻔한 일들이 빈번했다. 오늘이 내 제삿날 될 뻔했다면서 가슴 쓸어내리며 취하도록 마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 시절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은 살아있지만 내일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다. 


어느 날, 아침을 함께 했던 옆방 후배가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순직했다. 평소 친하게 지냈고 주말에 애인 만난다면 자랑하던 후배라서 마음이 몹시 아팠다. 순직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숙소로 돌아와 후배 방문을 열고 청소와 정리정돈을 했다. 평소 후배 방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인의 뒷모습이 깔끔하고 정결하게 보일 수 있도록 내가 방을 치운 것이다. 얼마 후 관계자들과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러 왔으며 깔끔하게 정리된 아들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순직한 후배방을 치우면서 누드사진 같은 민망한 물건들은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 버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음 후 누군가가 내 방에 왔을 때 민망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이후 나는 방을 나갈 때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젊은 시절 습관은 지금도 남아서 방을 꼭 정리하고 외출한다.


위험한 직업으로부터 벗어난 이후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점점 옅어져서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2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작년 인도 여행 중 바라나시에서 죽어가는 소녀와 화장터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죽은 후 어디로 가며 언제 죽어야 하는가? 


첫째, 나는 죽은 후 어디로 가게 되는가?


죽은 후 어디로 가는 줄 알아야 언제 죽어야 하는지 결심할 수 있다. 죽은 후 더 좋은 곳으로 간다면 언제 죽어도 상관없지만 죽은 후 괴로운 곳으로 간다면 가급적 오래 살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의문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태곳적부터 사람들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를 궁금해했다. 저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죽은 후 자기가 갈 곳을 상상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에는 죽으면 죽음의 집으로 간다고 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가 다시 살아난다고 했고 아브라함계 종교는 천당과 지옥으로 간다고 했고 인도사상계 종교에서는 윤회하여 뭔가로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장자는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했고 니체는 다시 태어나 같은 삶을 살아간다고 했고 스티븐 호킹은 소멸한다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소멸할 수도 있고 어딘가로 가게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아무도 가본 적이 없으니 어느 주장이 맞는지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60년 이상 살아오면서 배우고 공부하고 경험하고 느낀 내용을 바탕으로, 훌륭한 사람들의 주장 중에서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죽은 후 소멸되어 버린다고 한 스티븐 호킹의 주장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죽은 후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 조금 아쉽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소멸될 수도 있지만, 뭔가로 다시 태어나거나 어딘가로 갈 수도 있다고 하니 마음이 편안하다. 나는 스티븐 호킹의 주장보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고 나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선고 후 최후진술에서 “죽은 후 소멸되어 버린다면, 깨지 않는 긴 잠에 빠지는 것이니 숙면을 하게 되어 기쁜 일이고 죽은 후 어딘가에 간다면 이미 죽은 사람들을 만나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 또한 기쁜 일 이어서 죽음 역시 기쁜 일이다”라고 하면서 독배를 기꺼이 마셨다. 


나훈아가 “테스형” 노래 가사에 “먼저 가본 저세상 어떤 가요 테스형, 가보니까 천국은 있던가요 테스형”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소크라테스 최후 진술에서 모티브를 받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 후를 얘기한 어느 현인에 비해서도 꿀리지 않는 훌륭한 분이시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현 세상을 움직이는 정신은 기원전 5세기경 활동한 이사야(유대교 선지자),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4명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 불교, 유교 창시자와 동급이니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따른다고 해서 사이비 사상에 빠졌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오래 살 수도 있지만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 주장처럼 죽은 후 소멸되어 버린다면 긴 숙면을 즐기면 되는 것이고 새로  태어나거나 어딘가로 가게 된다면 새로운 곳에서 또다시  멋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으니 이 또한 기쁜 일이다. 긍정적으로 살아간다면 어디를 간들 즐겁지  않겠는가? 아내가 죽은 후 동이를 두들기며 춤을 추었다는 장자처럼 죽음이 기쁜 일 까지는 아니더라도 억울할 것은 없다.

독배 받기 전 제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하는 테스형


 둘째,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가? 


당장 내일이라도 죽음이 나를 찾아올 수 있지만 운이 좋아 오래도록 죽지 않는다면 언제까지 살아 있어야 할까?


진시황제는 평생 죽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52세에 죽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100세 시대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120세 또는 150세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심지어 구글은 인간 수명을 500세까지 늘리는 연구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건강하다면 아니 건강하지 못해도 숨만 쉴 수 있다면 100살 120살 150살 500살까지 살아 있어야 하는 건가? 


니체는 언제 죽어야 할지 고민했다. 당시 평균수명이 지금의 절반에 불과했지만 자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 “사람들이 불필요하게 너무 오래 산다”라고 불평했으며 “제때에 죽어라”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전에는 스스로 생을 포기하는 것을 죄악시했으나 이제는 안락사 존엄사처럼 본인이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세상이 변하고 있다. 


2018년 호주의 식물학자 구달은 104세에 특별한 병이 없었음에도 존엄사를 택하여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삶이 기쁘지 않고 남의 신세만 져야 하며 갈수록 건강이 나빠질 것이기 때문에 존엄사를 택한다고 했다. 미리 죽지 못하고 이때까지 살고 있는 것이 후회스럽다고도 했다.

존엄사를 위해 스위스로 간 구달박사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면 구달 박사처럼 건강이 어느 정도 유지되더라도 존엄사를 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행복하다면 건강이 안 좋아 남에게 폐만 끼치더라도 평생 살아 있어야 하는가? 의문이다. 긍정적인 사람은 건강에 무관하게 행복할 수 있고 치매 환자는 주변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마냥 행복할 수 있다. 의학의 발전으로 생명연장까지 가능한 세상이라서 긍정적인 사람과 치매 환자는 돈만 있다면 의학이 발달하는 만큼 100년이던 200년이던 500년이던 계속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예외 없이 늙고 노쇠해진다. 노쇠하여 자기 몸을 건사하지 못하게 되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되면 몸과 마음이 불편하여 즐겁지도 행복하지도 못할 가능성이 크다. 구달 박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삶이 행복하지 못하여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면서 존엄사를 택했다. 그러나 평생 눈이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렸던 헬렌켈러는 이런 상황에서도 평생 행복했다고 한다. 마음이 긍정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구달 박사가 헬렌켈러처럼 마음이 긍정적이었다면 존엄사를 택하지 않고 지금까지 민폐 끼치면서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는 요양병원에서 6년을 계시다가 2년 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몹시 긍정적인 분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힘든 상황에서도 내가 “어머니 어떠세요” 하고 물으면 “응 좋아” 하며 웃으셨다. 혼자서 움직이기 어려운 힘든 건강상태 에도 불구하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미래를 생각해 봤다. 나도 어머니를 닮아서 웬만한 어려움은 웃으면서 넘기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나는 구달박사와 같은 상황이 되더라도 존엄사를 택하지 않고 헬렌켈러처럼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살아있다는 그 자체에 행복해할 것이며 병실에 누워서 창밖의 파란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쳐다보고 있어도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몸 건사도 못하고 민폐만 끼치면서도 행복해하면서 계속 살아야 하는가? 니체가 얘기한 “제때에 죽어라”가 언제일까? 90세? 100세? 120세? 150세? 500세?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세상이긴 하지만 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들어 여러 사람에게 민폐가 된다면 구달 박사처럼 스스로 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러 사람 민폐 끼치느니 테스형처럼 죽어서 편한 잠을 자거나 다른 곳에 가서 새 삶을 사는 게 나와 주변 모두를 위해 좋을 것이다. 


정신이 건강할 때 이문제를 확실히 하고 공적서류를 만들어 애들에게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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