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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Jul 29. 2019

1970년대 자전거 여행의 추억



77년 자전거 여행을 했다. 요즘이야 자전거 여행이 대중화되었지만 42년 전 자전거 여행은 모험이었다. 자전거 도로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좁은 국도를 자동차와 함께 달려야 했기 때문에 위험했다.


77년 대학 3학년 여름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여수까지 자전거 여행을 했다. 친구 집이 태능이었고 내 고향이 여수 오동도 부근이어서 태능에서 오동도까지 자전거로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가는 도중 친구들이 사는 논산, 전주, 전남 곡성을 들리기로 했다.


계획을 세운 후 자전거와 용품을 구입했다. 자전거는 사이클 기본형을 샀다. 요즈음은 최소한 7단이고 고급품은 21단이다. 당시는 대부분 1단이었다. 3단이 있긴 한데 라이딩하면서 기어를 바꿀 수는 없고 자전거를 세운 다음 바꿔야 했다. 


자전거를 산 다음 체육사에서 자전거용 체육복을 맞췄다. 당시는 자전거용 복장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체육복 전문점에서 맞췄다. 일반 체육복과 다른 점은 상의 뒤편에 호주머니가 있어서 등 뒤에 간단한 소지품을 넣을 수 있었다. 바지는 통이 좁은 그냥 반바지였다. 지금은 안장과 마찰하는 부분에 덧대어서 엉덩이 부상을 방지해 주는데 당시는 그냥 반바지였다.


헬멧은 없었다. 헬멧은 국가대표 선수나 착용하는 특수품이었다. 그냥 모자인데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챙이 작고 머리에 꽉 끼는 그냥 천으로 된 모자였다. 신발은 그냥 테니스화를 신었다. 장갑은 면장갑에 손가락 부분을 반쯤 가위로 잘라내고 사용했다. 사이클 복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획기적인 차림이었다. 국가 대표급 사이클 선수가 아니면 이런 옷을 입지 않았다.    

                                              

나는 초등 5년 때 자전거를 배웠다. 당시는 아동용 자전거가 따로 없어서 어른용 자전거로 배웠다. 안장이 높아서 앉을 수가 없으므로 안장 앞부분에 다리를 넣고 서서 자전거를 탔다. 앉아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들어가서였으며 그때도 엉덩이를 좌우로 틀면서 발끝만 겨우 페달에 닿았다.


70년대 초까지 여자는 처녀막을 상하게 한다는 속설이 있어서 자전거를 못 타게 했다. 지금도 사우디 여자는 같은 이유를 자전거를 못 타게 한다. 여학생이 자전거를 대중적으로 타기 시작한 것은 1972년부터이다. 당시 문교부에서 학생들에게 1인 1기 운동을 강조했다. 모든 학생이 운동 하나씩 해야 한다는 취지였는데 남자는 주로 태권도를 했고 여학생은 자전거 타기가 많았다. 


나는 초등시절부터 자전거를 탔고 아버님 출퇴근용 자전거를 자주 탈 수 있어서 기술이 좋았다. 오래 타다 보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묘기도 부릴 수 있었다. 대학 시절까지 가끔 자전거를 탈 기회가 있었으나 장거리를 라이딩할 기회는 없었고 잠시 타는 정도였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자전거를 타기는 하나 잠깐잠깐 타는 정도여서 장거리 라이딩에 필요한 근육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1977.7.30 태능 출발






7월 말 장마가 끝나자 자전거 여행을 출발했다. 햇빛이 작렬하고 30도가 넘는 본격적인 무더위였다. 2018년 여름은 100년 만의 더위라고 했다. 2018년 이전 최악의 폭염은 바로 1977년이다. 자전거 여행을 출발한 7월 30일 대구 온도가 40도를 넘겨서 기상청 생긴 이후 최고 온도였다. 전국이 찜통으로 변한 날 최악의 더위를 뚫고 태능에서 오동도까지 400킬로의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다.




첫 휴식지 수원






출발 전날 친구 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태능에서 청량리 종로를 거쳐 한강 다리를 건넌 후 안양, 수원, 평택, 천안을 거쳐 공주까지 내려갔다. 50분 라이딩에 10분 휴식했다. 무더운 날씨라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머리에서 내려오는 땀이 턱에 모여서 방울을 이루어 떨어진다. 1초에 두세 방울 정도 빠르게 떨어진다.


서울에서 여수까지 도로 위에 나의 땀이 촘촘히 뿌려졌을 것이다. 50분 라이딩 후 휴식할 때면 물과 함께 염분 보충을 위해 소금을 한 스푼씩 먹었다.    


태능에서 공주까지는 당시 국도로 200킬로쯤 된다. 새벽 6시쯤 출발하여 오후 6시쯤 공주에 도착했으니 식사, 휴식 포함 12시간을 라이딩한 것이다. 더 내려갈 힘은 있었으나 안장과 마찰하는 엉덩이 부근이 아파서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피곤한 표정으로 충남 진입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엉덩이 안쪽은 체력과 무관했다. 평생 힘 받아볼 일이 없었던 엉덩이가 12시간 동안 안장에서 계속 마찰하였더니 피부가 벗겨져 버렸다. 운동을 많이 해서 다리는 무쇠처럼 튼튼했지만 12시간 페달을 돌렸더니 무릎에서 뜨거운 열이 난다. 그리고 핸들을 붙잡은 손바닥이 전부 물집이 잡혀서 퉁퉁 불었다.


허름한 여인숙에 여장을 풀고 옷을 벗었더니 엉덩이 안쪽이 벗겨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라이딩할 때는 더위에 정신이 몽롱해서 통증을 못 느꼈는데 쉬고 있으니 중요부위 주변으로 통증이 심했다. 약국에 가서 약을 사서 바르려니 상처부위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 발라주면 되겠지만 아무리 남자끼리라도 그곳을 보여 주는 게 민망했다. 


마침 벽에 걸린 조그마한 거울이 있어서 거울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쪼그려 앉아서 약을 발랐다. 그날 나의 숨겨진 곳을 처음 봤으며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그날은 피곤해서 둘 다 곤히 잠에 빠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욱신거리며 몸이 천근만근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전거에 올랐더니 엉덩이 안쪽이 아파서 안장에 앉을 수가 없다. 안장에 닿기만 하면 통증이 항문으로부터 머리끝으로 쭈뼜 올라온다. 


온몸이 욱신거려도 견딜 만 하지만 피딱지가 붙어있는 아랫동네는 참기 어렵다. 그래도 일단 출발했다. 안장에 엉덩이가 닿지 않도록 서서 라이딩했다. 그러다 보니 다리와 무릎에 무리가 온다. 다리가 아프니 엉덩이가 아프더라도 안장에 앉게 된다. 처음에는 통증이 심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엉덩이가 마비되어 통증을 못 느낀다. 


한 시간쯤 라이딩하고 쉬면서 보니 무릎이 빨갛게 충혈되고 열이 심하게 난다. 물집이 터진 손바닥은 다시 물집이 생기면서 통증이 온다. 손바닥으로 핸들을 못 잡고 주먹으로 핸들을 누르면서 라이딩했다.


첫날은 힘차게 200킬로를 거뜬히 내려갔는데 둘째 날은 몹시 힘이 든다. 엉덩이는 바늘로 쑤시듯이 아프고 무릎에서는 뜨거울 정도로 열이 나고 손바닥은 물집이 생겨서 핸들 잡는 게 고통이다. 첫날과 달리 쉬는 시간이 차츰 늘어간다. 힘이 빠져서 고갯길 올라갈 때면 내려서 끌고 가야 했다. 


지도를 보면서 국도를 따라 내려갔는데 논산에 있는 친구 집을 가는 길이 비포장이다. 돌로 울퉁 불통한 비포장 도로를 가다 보니 펑크가 난다. 자전거 수리점을 찾을 때까지 한참을 끌고 갔다. 당시 자전거 타이어와 튜브가 성능이 좋지 않아 그 후로도 펑크가 서너 번 더 발생했다. 그때마다 수리점을 찾아 헤매었다.   

 






논산에서 전주 가는 길에 잠시 휴식













겨우 찾은 논산 친구 집에서 점심을 얻어먹고 다음 목적지인 전주 친구 집을 향했다. 한 시간쯤 내려가다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카메라가 없다. 논산 친구 집에 두고 온 것이다. 카메라를 찾으러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그렇잖아도 힘든 고행길 넋 나간 표정으로 다시 갔다 왔다..


전주 친구 집에 갔더니 친구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신다. 하룻밤 잘 대접받고 푹 쉬었다. 이제 엉덩이, 무릎, 손바닥은 거의 마비 상태이다. 상처는 더 악화된 상태였으나 통증이 무뎌져서 견딜만하다.


다음날은 오히려 전날보다 더 견딜만했다. 다음 목적지인 전남 곡성을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땡볕에 무더위는 변함이 없다. 무더위에 땀을 흘리면서 한두 시간 가다 보면 몸의 통증은 마비되고 정신은 몽롱해진다. 


이 상태에서는 겁이 없어진다. 뒤에서 아무리 차가 빵빵거려도 개의치 않는다. 열 받은 운전사가 우리를 칠 듯이 스쳐 지나가면서 핸들을 우리 쪽으로 틀어버린다. 차 옆면에 부딪치면서 땅에 내동댕이 쳐지기도 한다.   




피곤한 모습으로 전남 진입






최악의 상황은 남원 10~20킬로 전쯤에 있는 고갯길에서 발생했다. 고갯길을 올라갈 때부터 비가 내리더니 내리막이 시작되면서 소나기가 심해졌다. 내리막에 자전거에 속도가 붙는데 빗물이 윤활유 역할을 하여 브레이크가 작동을 안 한다.    


속도가 점점 가속되더니 커브길에서 속도 처리가 안되어 선회를 못하고 도로 밖으로 밀려났다. 자전거와 함께 허공을 날아 3미터 정도의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언덕 밑은 논이었다. 


8월 초여서 언덕 밑의 논에는 벼가 자라고 있었고 물도 충분히 많았다. 나와 자전거는 허공을 난 후 논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리가 욱신 거리기는 하지만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그러나 자전거가 핸들 아래가 부러져서 두 동강이 나버렸다. 함께 간 친구는 내 상황을 모르고 혼자 가버렸다. 


두 동강 난 자전거를 둘러메고 절뚝거리며 고갯길을 걸어 내려왔다. 계속 걸을 수 없어서 지나가는 트럭을 히치하이크하여 부러진 자전거를 싣고 남원으로 향했다.


앞에 갔던 친구가 저 멀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원시내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고치고 광한루에서 춘향의 기를 받은 후 곡성으로 향했다. 당시 남원에는 도로가 온통 자전거였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동안 자전거가 가장 많은 도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원 광한루에서







자전거 라이딩으로 인한 부상과 넘어져서 생긴 부상까지 온몸이 욱신거린다. 해 질 무렵 곡성 친구 집에 도착해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숙박했다


3일째 아침 무거운 몸을 움직여 또다시 남쪽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곡성에서 여수까지는 100킬로 정도였다. 20세 가장 체력이 좋은 시기여서 그런지 3일째는 큰 고통 없이 여수까지 라이딩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남해화학 여수공장 준공은 1977.8.4일이었고 나는 8.2일 도착해서 사진을 찍었다.   




1977.8.2 목적지 여수 도착






20세 때 3박 4일 간 서울에서 여수까지의 자전거 여행은 지금도 생생하다. 체력적으로 최강인 그 시기에도 중도 포기를 여러 번 고민할 정도였다. 가장 더운 시기에 벗겨진 피부를 안장에 계속 마찰하면서 탈진할 정도로 힘든 라이딩을 한 것이다. 


이 경험은 두고두고 소중했다. 이후에 겪게 되는 어떠한 육체적인 고통도 이때에 비하면 약과였다. 육체적인 고통이 올 때마다 이때를 떠올리며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가장 자랑스러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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