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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간비행 Jul 30. 2019

환갑 기념 히말라야 트래킹


1994년 나는 어머니 환갑을 기념하여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일가친척을 부르고 내 친구와 동료들도 불렀다. 혼자 계신 어머니에 대한 효도라 생각했고 어머니도 흡족해하셨다. 불과 25년 만에 세상이 변했다. 환갑은커녕 칠순도 소리 없이 지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평균수명 60세도 안되던 시절에야 60까지 살아있는게 축하할 일이었겠지만 100세 시대에 60세, 70세를 축하한다는게 쑥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환갑은 동양사상인 60 갑자에서 새로운 갑자가 시작되는 제2의 인생 시작점이다.


2017.5월 내 환갑이 됐다. 나는 제2의 인생 시작점을 맞이하며 뭔가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버켓 리스트 중 하나인 히말라야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인터넷을 뒤져서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래킹 패키지 상품에 가입했다. 여행사에서 가져오라는 장비를 보니 나에게 없는 것이 많았다. 나는 가끔 북한산을 등산했는데 특별한 장비 없이 그냥 등산복에 등산화 신고 물통만 들고 다녔다.


장비를 사려고 제법 유명한 등산 전문점에 갔다. 상점 주인은 히말라야 가려면 최고의 장비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옆에서 물건을 둘러보던 한 여성이 자기는 30년 경력의 등산가이며 히말라야는 안 가봤지만 일본 알프스를 여러 번 가봤는데 높은 산은 장비가 중요하다고 바람을 잡는다.


나 역시 히말라야에서 수많은 등반가가 조난당한 것을 들은 바가 있어서 좋은 걸로 추천해 달라고 했다. 상점 주인은 신이 났다. 이것저것 챙겨서 나에게 가져왔다. 처음 보는 물건도 많았다. 


파격적인 할인가 라면서 침낭 80만 원, 스틱 35만 원, 내의 14만 원, 우의 10만 원, 양말 3.5만 원, 물통 3만 원 등등 엄청 비싼 물건을 내놨다. 나는 지금까지 5천 원짜리 스틱, 2천 원짜리 우의와 양말, 천 원짜리 물통 들고도 북한산을 잘만 다녔는데 억 소리 나는 가격이다. 총 400만 원 이란다.


뭐가 이리 비싸냐고 했더니 옆에 있던 바람녀가 목숨이 걸린 건데 돈 아끼려 하느냐고 핀잔을 준다. 높은 산은 기상변화가 심해서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급박한 상황에서는 장비의 조그만 성능 차이가 생명을 좌우한다는 그럴싸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래 환갑 기념으로 히말라야 가는 건데 거기서 죽으면 안 되지. 등산복, 등산화, 패딩, 모자, 배낭, 렌턴, 장갑 기타 등등 보지도 못했던 온갖 장비를 한꺼번에 사버렸다. 


400만 원을 결재하면서 생각했다. 병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면 집을 팔아서라도 치료받는데 히말라야에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돈이 문제야? 생각하고 질렀다.


상점을 나오자마자 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티브이 프로그램에 쌍꺼풀 수술하러 갔다가 성형외과 바람녀에게 꼬드겨 턱뼈 깎았다고 속상해하던데 내가 그 꼴이 되어버렸다. 


바람녀에게 넘어간 나의 바보 같은 행동에 화가 났지만 혹시 조난이라도 당하면 좋은 장비가 생명줄이 될 거야 하면서 위안했다.




총 10명의 멤버






인천공항에서 트래킹 멤버가 처음 대면했다. 멤버는 총 10명이었다. 멤버들은 모두 등산 전문가 급이었다. 백두대간 전구간을 서너 번 완주한 사람도 있고 한국의 100대 명산을 모두 등산한 사람도 있었다. 한 멤버는 인수봉 바위에 매달려 비박하는 무시무시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히말라야를 가려고 모인 사람들이 북한산 등산하는 사람들과 차이가 없었다. 그냥 낡아빠진 옷과 장비를 들고 있었다. 나는 히말라야를 가려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멤버들은 내가 이상하듯이 쳐다봤다. 등산 베테랑들 눈에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번쩍이는 장비를 애지중지 들고 있는 내가 한심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것도 상표 막 떼어낸 신삥으로만. 


며칠 지나고 친해지자 멤버 중 한 명이 내 장비 구경 좀 하잔다.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최고급이라고 감탄한다. 나는 4200미터 올라가는 안나푸르나 트래킹 장비가 아닌 8800미터 올라가는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에 필요한 장비를 산 것이다. 집에서 쓰던 거 가져왔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4월 말 네팔 카트만두 공항에 도착하여 등반 지역으로 이동한 후 포터들과 합류했다. 포터들은 우리 멤버 인원과 비슷한 9명이었다. 이들이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식사까지 준비한다. 우리는 음료수 등 간단한 짐만 챙겨 걸어가면 되었다.


포터들의 복장을 보고 실소했다. 내가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갈 때의 복장과 비슷했다. 반팔 반바지에 슬리퍼 그것도 발가락 조리 슬리퍼를 신은 친구까지 있다. 나는 들지도 못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슬리퍼를 끌고 히말라야를 올라간다. 게다가 30대의 애엄마 포터도 있다. 정상 가까워 오니 운동화는 신고 있는 포터로 바뀌었다. 


등반하다 보니 머리 허연 80대, 대여섯 살짜리 어린이를 데려온 젊은 부부, 목발 짚고 올라온 사람도 있다. 보스니아 사람인데 세르비아 전쟁 때 발이 잘렸단다. 장님도 아들 손잡고 왔다고 했다. 환갑 기념으로 여기 온 것에 자부심을 가졌는데 바로 꼬리 내리고 겸손해졌다. 항상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했다.


8일간 걷기만 했는 데 따라다닐만했다. 나는 5년간 매일 배드민턴을 해서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고 트래킹 코스가 북한산 올라가는 듯한 수준이어서 별 무리가 없었다. 



로지의 전형적인 모습

창고 비슷한 곳에 나무침대에 매트리스가 있다.

눅눅해서 찝찝하다. 



단지 저녁에 열악한 숙소에서 씻지도 못하고 침낭에서 자는 게 힘들었다. 마지막 날 4000미터쯤 되니 산소부족에 따른 고산병 증세가 왔다. 현기증이 나고 매스꺼웠다. 그때 힘들었다.


산에는 한국사람들이 많았다. 중간중간에 있는 식당에는 한국어 메뉴판도 있었다. 얼마나 한국사람이 많이 오면 메뉴판을 한글로 했을까? 한국사람들의 여행 욕망은 세계 최고 수준일 것이다.



한글로 메뉴가 적혀있다.

어떤 집은 막걸리 있습니다라고 광고까지 한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여 1박 하고 다음날 하산했다. 산소가 부족한 정상에서 하산하니 내려올수록 힘이 솟는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히말라야의 경관을 즐기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하산했다.


등정은 완만한 경사로를 이용했으나 하산은 급경사로 내려왔다. 한 시간쯤 내려왔는데 일행 중 한 명이 선글라스를 두고 왔다며 소란이다. 포터에게 10불 준다고 하니 서로 가겠다고 경쟁한다. 급경사로 한 시간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힘든 코스인데 만원에 서로 가겠다고 경쟁하는 게 안쓰러웠다.


10박 12일의 일정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다. 버켓 리스트 하나를 마쳤다. 안나푸르나 등정은 나에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육체적으로 크게 힘든 것은 없었지만 열악한 숙소에서 샤워도 못하고 침낭에서 자야 하는 불편함을 7일간 계속했다. 


그동안 편안함에 길들여진 나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좀 불편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안나푸르나 트래킹 중 그 불편함도 견뎠는데 이 정도쯤이야 하는 야성이 돌아왔다. 야성을 잃는 순간 젊음이 사라진다.


나는 안나푸르나 가기 전에는 북풍한설 몰아치는 무시무시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정신 안 차리면 눈 속에 파묻혀 냉동인간이 되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온갖 최고의 장비를 산 것이다. 그러나 4월 말의 안나푸르나는 눈 덮인 정상을 빼고는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산야였다.


안 가본 사람은 그곳을 지옥의 코스쯤으로 생각한다. 내가 환갑 기념으로 히말라야 트래킹 다녀왔다고 하면 놀라워한다. 60대에 극한의 고통과 역경을 이겨낸 인간승리의 표상쯤으로 생각한다. 그건 전혀 아니지만 그냥 모르는 체 한다. 목발로, 시각장애로 아들 손을 잡고, 팔십 노구를 끌고 이 정도는 되어야 역경을 이겨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푸르나 등정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다. 등반 자체는 지리산이나 설악산 정도이다. 다만 그런 등반을 일주일 이상 계속해야 되고 숙소가 열악하다는 점이 힘든 일이다.


안락함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게 힘들다. 나도 그동안 안락함에 길들여져 있었다. 낮에는 아무리 힘든 일을 하더라도 일이 끝나면 깨끗이 샤워하고 편안한 침실에서 쉴 수 있었다. 안나푸르나 트래킹은 최소 1주일간 안락함에서 벗어나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사진을 많이 찍었다. 특히 정상 부근 눈 덮인 마차푸차레 산 앞에서 찍은 사진은 멋있게 잘 나왔다. 이사진 한 장 만으로도 히말라야 다녀온 가치가 있다고 할 정도이다.

사무실 컴퓨터 배경화면에 그 사진을 올려놓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물어본다. 여기가 어딥니까? 음~ 환갑 기념으로 히말라야 다녀왔어. 와~~ 히말라야를 환갑 기념으로요? 그 맛이다.


이사진을 브런치 두 번째 글 배경 사진으로 사용했다. 내가 5개의 글을 올렸는데 이글만 조회수가 5일 만에 5천 회를 기록했다. 다른 글과 아무 차이가 없는데 조회수가 20배 이상 차이 나는 것을 보면 사진의 위력이 대단함을 느낀다.


안락함에 도취되어 정신이 나태해질 때 히말라야 트래킹을 추천한다. 하루 종일 땀 흘린후 샤워도 하지 못하고 마구간 같은 로지에서 입던 옷 그대로 침낭 속에서 자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70회 생일 때 다시 한번 다녀올 생각이다. 그 전이라도 내가 나태해졌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다시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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