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 너는 아들
명절 같은 연휴가 이어지고 있다. 아이와 몇 달째 껌딱지가 되어 붙어있으니 연휴인지도 몰랐다. 코로나 이후로 나와 아들 사이는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를 여러 번 반복한 후 현재는 평화를 찾은 상황이다. 어쩌면 휴전상태인지도.
중학교 1학년, 건강한 독립을 위해 애를 썼던 그 노력이 무색해졌다. 아이를 기숙사 학교에 보내 놓고 난 굳건한 마음을 가진 씩씩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입학식 전날부터 눈물바람이었고, 화창한 봄날은 가슴이 쓰리기만 했다.
아이에게는 기숙사 학교를 몇가지 합당한 이유로 권하였으면서 정작 아이를 떨어뜨리고 난 후 내 마음엔 구멍이 나버렸다.
매일 밤마다 9시 15분을 전후로 걸려오는 전화가 목숨과 같았다. 혹시나 그날은 아프지 않았는지, 친구와 싸우지는 않았는지, 밥은 잘 먹었는지 그저 아이가 무탈하기만을 바라는 그 마음은 내가 아이를 처음 낳았을 때의 마음과 비슷하였다.
그때 역시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이 소망이 전부였으리라.
입학한 후 봄이 지나자 이 소박한 소망은 슬금슬금 기어들어갔으며 아이에 대한 조바심과 성적 걱정을 하며 다른 엄마와 별다를 바 없는 엄마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주말에 데리고 나오면 바로 수학학원으로 직행하였고, 학교 가기 전엔 영어 독해를 시키며 틈 없는 준비를 하도록 시동을 걸었다. 그 시동은 속도가 붙어 중학교 1학년 2학기 주말. 토요일은 하루 종일 수학학원에서 살도록 만들었다. 이건 아들이 원했다. (다행이야. 내가 시킨 것이 아니라서.)
그렇게 중학교 1학년 생활은 첫 학년 치고 꽤 마음에 드는 학교생활을 하였다. 독서 대상도 받았고, 영어 말하기 상도 받았으며 도서관 사서도 하면서 아이는 나름대로 자존심을 치켜세우며 허세를 떠는 증서를 만들어냈다. 이 부분은 10퍼센트의 잔소리와 자신의 노력 결과였다.
겨울 방학을 하자마자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아들은 나와 여행을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지라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첫날은 제주도에서 보냈다. 어차피 곧 수학 캠프가 있었기에 그 정도의 자유는 괜찮았다.
1월은 수학캠프와 영어캠프로 다시 아이와 헤어졌다. 그저 내가 할 일은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고 오라는 말을 전하고 아이가 없는 동안 내 일을 하는 걸로 충분했다. 좀 그럴듯한 이유를 대자면 수학과 영어공부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외동아들인 이 녀석은 관계망이 부족하다. 집단생활을 강제적으로 시키면서 사람과 얽히고 부딪치며 자신의 성격과 위치를 자연스레 알아가며 성장하기를 바라였기에 난 캠프 속으로 아이를 집어넣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나의 일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다. 13년째 아이들 영어를 가르치고, 성격검사를 하여 진로를 찾고 생기부를 보고 자소서 수정을 하며 흔한 말로 아이의 눈빛을 보면 척하면 척인 선생님이 되었지만, 내 뱃속으로 낳은 이 아들은 늘 경로 이탈. 파악이 안되어 뒤통수가 띵 하는 순간이 허다하였다. 중학교부터 독립을 시킨 것은 아이에게는 선생님이 되기 싫었고, 어차피 내 아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을 나는 진작에 알았으며, 그저 엄마만 되겠노라 하며 날마다 연습하였건만.
아이에게 무한한 지지와 믿음만을 가지려고 했던 이 마음은 코로나로 습격 당하여 지지는커녕 날마다 잔소리 폭격을 가하는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늘 원하는 우아한 엄마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이건 네 탓이야. 라고 우긴다)
기숙사에 있을 때는 1등으로 일어났던 기상 시간은 낮 열두시로 변했으며, 아침마다 깨우기를 헐크처럼 하고, (아이가 아침마다 의식이 없다. --;)
밤에 잠이 들기까지 적군의 동태를 살피느라 내 마음은 가뭄이 들기 시작하였다.
꽤 사이가 좋았던 우리는 코로나로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히는 순간을 수십 번은 맞이하였으리라.
아들의 공부와 게임 시간, 영어 수업 등을 전두지휘하던 나는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나의 사춘기는 순하고 등신 같았는데, 내 아들은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며 자기표현을 마다하지 않고, 공부해야 해! 의 나의 외침에 내가 알아서 할래!! 하며 내 입을 막았다. 그러나 알아서 한다는 찰떡같은 그 소리는 개떡으로 변신하여 배신감을 번번이 내게 안겨주었다.
지난 봄, 코로나의 해 2020년 3월은 비극이었다. 아이의 호르몬은 몸 안에서 거꾸로 흐르는 것이 분명하였다. (이 아이 덕분에 나는 피가 거꾸로 흐른다. 저혈압이라 건강에는 도움이 되었다.)
밤 열두시, 한시는 대낮 같아 나와 카트라이더 한 판을 하는 것이 소원이고, 대낮 같은 아침은 한밤중이었다.
작년의 모범생 아들은 남의 아들이 되어 저 멀리 지구 밖으로 보내버렸다.
꽤 책을 읽던 아이는 넉 달 동안 한 권을 읽었으며, 수학 숙제와 영어 숙제는 이제 세월아 네월아~되어 다른 아이들은 한 시간에 할 것을 내 아들은 삼 일 동안 쥐고 있다.
반은 내버려 두고, 반은 포기하지 아니하여 결국엔 하게 만들었지만, 내가 이 인간한테 수업료를 받고 가르치는 것은 아니니 다른 아이들에게 보이는 자상함과 철두철미를 보여주는 것은 만무하다.
수업 전과 후에는 나의 아들에게 온 힘을 뺏기고 있었고, 수업 중에는 다른 아이들과 쉴 새 없이 마주하느라 나는 거의 폐인이 되었다. 이대로 며칠이 더 지속되었다가는 위태로워짐이 분명하였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려고 하여 얼굴을 책상에 처박고 엎드려 있을 때, 남동생이 나타났다.
항공사 승무원인 남동생은 코로나가 선사한 두 달간의 휴직을 받자마자 조카 앞에 나타났으니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날부터 나는 전쟁터 밖으로 빠져나왔으며 아들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삼촌과 함께 또 다른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삼촌은 개판과 개떡이 되어 무너진 열네 살 조카의 행동거지를 파악하고 바닥을 치고 있는 수학 문제지를 폈다. 폐허 속 과외는 힘을 잃어 수학 과외는 중단했다. (그 돈은 차 정비와 나의 약 값으로 떨어져 나갔다.)
4월. 남동생은 조카와 일심동체가 되어 공부와 게임을 같이하며 나의 짐을 덜어주었다.
다시 평화가 찾아들었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아이를 지켜봤다.
삼촌과 수학 문제지 몇 장과 카트라이더 대결로 거래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이어나갔다. 삼촌이 흐트러진 공부를 바로 세우려하니 도대체 언제 복직을 하냐며 노래를 부른다. 어리광을 부리러 달려온다. 이젠 내 키를 훌쩍 넘어서 징그러운데 안아달라고 징징거리고, 입술을 오므리며 뽀뽀를 원한다.
다시 엄마를 찾고 싶었을 것이다. 공부해라, 숙제해라 잔소리를 걷어치우고 자전거를 타고 손을 맞잡고 산책을 하며, 나는 아이와 친구가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 잔소리를 아예 안 할 수는 없다.
영어는 중단했다. 넌 어쩔 수 없이 벼락 치기를 하게 될 것이야 하며, 지금은 아이와 나란히 걷기를 선택했다.
수동태와 부정사 설명하다가 내 수명이 줄어들 것을 걱정하여 오래 살 것을 선택했다.
전쟁 같은 하루에 숨이 차면서도, 두 번째 업은 작가인지라 날마다 어떤 글이라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고, 매주 수요일마다 진행하는 독서모임으로 책을 끼고 있어야 했으며, 본업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강의를 들으며 리딩을 하고, 감사일기를 쓰고 필사를 날마다 하며 개떡같은 아들 앞에서는 24시간을 범생이 엄마로 살았다.
첫 번째 책이 나왔다. 허세 작렬인 아들은 자기가 쓴 책도 아니면서 왜 설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만, 그래도 엄마가 작가가 된 것을 뿌듯해하고 있다.
내가 계속 글을 쓰기를 바란다. 가끔 내게 왜 글을 안 쓰냐고 잔소리를 하는데, 너는 공부를 안 하냐고 하면 자기를 안 믿냐고 입을 놀린다.
4월 마지막 날. 느닷없는 깊은 대화가 열렸다.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출간 전 예고 포스트를 아이는 보게 되었다. 표정이 일그러진다. 자신이 몰랐던 엄마의 과거가 드러나는 그 예고편에 눈빛이 흔들렸다.
그때 시간은 밤 12시. 아들과 마주 앉았다.
"엄마는 울타리를 친 채, 너를 키우기 위해 그 세월을 견뎠어. 아파도 아프지 않으려고 했고, 오로지 너를 보면서 살았어. 그런데 말이야... 이제는 엄마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엄마가 왜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는지 알아? "
아들에게 고백했다. 내가 오랜 시간 글을 썼던 이유는 그것만이 나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고.
그러나 어느 순간, 내 삶에서 갇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 함께 살아갈 힘을 나누고 싶은 소망이 내 마음에서 자라고 있음을 알아차려 밤 한시가 되어도 책상 앞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마음이 어려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공부가 어려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꿈을 찾아주고 싶은 게 나의 소망이며 타인의 아픔을 알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날마다 내 마음속 흙탕물을 걸러내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너 역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돕고 싶어서 국제변호사에 꿈을 둔 거라며? 너의 첫 번째 이유였잖아. 네가 잘 살기 위해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큰소리친 것이 아니지 않아? 엄마는 네가 변호사가 되든 안 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일등 하기 위해서, 90점, 100점을 받기 위해서, 허세 부리려고, 잘난 척하려고, 자존심만 세우는 그런 공부 말고. 나를 올바로 세우고,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공부를 네가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난 아이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하였다. 지난번에 손잡고 걸으면서 잔소리만 하여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 ... 두 번, 세 번 해도 괜찮은 것이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엄마가 조바심이 나서, 너를 혼자 키우니 남보기에 더 괜찮은 너를 키워야 한다는 부담에 욕심을 부렸을지도 몰라.
"사실 넌 엄마가 어렸을 때보다 백배 천배 똑똑하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너를 믿지 못하고 걱정했어. 내년에 중3이 되고, 또 고등학교 가야 한다는 생각만 앞서니까... 아무 설명 없이 너에게 공부하라고 소리쳐서 미안해."
시간은 1시를 가리켰다.
"분노와 슬픔을 견딜수록 결국 엄마가 사는 힘은 커졌고, 매일 나를 마주하면서 나를 찾았어.
너도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진짜 너를 찾아가길 바라."
아이는 내가 작가가 된 것이 기쁘다고 했다. 어릴 때 때때로 글을 쓰면 읽어주곤 했는데, 그것이 겉모습 속에 가려진 나를 아이에게 알리는 끈이 되기도 하였다.
공부. 어쩌면 죽을 때까지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내 마음과 정신에 죽을 때까지 밥을 주는 것은 공부이니 눈앞의 시간만 생각하여 조급증과 불신으로 아이를 괴롭힐 이유가 없으리라.
이 녀석의 호르몬이 제대로 흐르는 날까지는 아이의 자유분방함과 원하는 것을 들어주자고 마음먹었다. 난 카트라이더를 연습하고 있다. 나와 한 판 붙기를 원하니
나는 이 아이가 자신을 올바르게 찾아갈 것을 믿으며 어떤 모습을 보여도 나는 사람이 아닌 엄마이기에 아이를 껴안아야 한다.
토끼눈이 된 아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다. 굳나잇~ 하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8시. 매일 아침 연체동물이었던 아들은 단 세 번의 부름에 눈을 떴다. 하루가 고요하구나 생각될 때 해가 졌다.
저녁에 수학 몇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더니 나를 바라본다.
엄마. 내일 나도 데리고 가면 안 돼? 아이도 어른도 아닌 정체불명의 녀석은 서울에 가야 하는 나를 꼭 따라가고 싶단다. 그래. 가자. 데리고 갈게.
아뿔싸. 내 대답에 일찍 자야 된다며 1초 만에 수학 문제집을 덮었다.
그리고 싱크대에 쌓여 있는 그릇을 보고 설거지를 한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으니
엄마는 글이나 쓰고 있으라는 걸까.
서울에 간다는 내 말에 어깨가 들썩들썩이다. 그렇다. 나와 추억으로 사는 아이였다.
코로나로 습격당한 일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하였다. 공부는 어차피 죽을 때까지 해야 할 것이니.
네가 스스로 공부의 목적을 찾을 때까지 나는 그저 너를 믿는 엄마가 되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