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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Mar 17. 2022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 사랑!

한강 둔치를 찾았다.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 무렵인데도 하늘은 빛바랜 회색으로 쉬이 어둠에게 밀리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더운 기운이 여전히 발끝에서 느껴지지만 뜨끈한 강바람은 37도를 웃돌았던 한낮의 열기를 잊게 한다.  저 멀리 양화대교와 마포대교를 반짝이는 오렌지색 조명이 한강 표면에서 춤을 추니 곳곳에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그들만의 언어로 교감하는 연인들을 더욱 밀착하게 한다. 순간 혼잣말을 내뱉고 만다. 

' 나도 저들처럼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까.'


나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나는 사랑에 실패한 사람이다-라고 쓸 것을 왜 굳이 복수 명사 중에 단수로 표현했을까.   사랑이라는 흔하고 고귀한 단어 앞에서  더 외롭게 느껴질 것을 미리 예방하는 것일까. 속내를 파내면 바닥을 보일 것 같으니 이 정도로 넘어가자. 

사랑의 이름으로 족쇄 혹은 감옥 같던 그때 그에게서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아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인생의 쓴 맛을 알기도 전인, 젊은 날에 사랑을 체념했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있다고 믿고 찾아 헤매는 것보다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살아가는 데에 속편했고,  혹여 어떤 이가 내게 또 다른 사랑을 원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쿨내 진동하는 담담한 톤으로 답했다. " 네. 원해요. 이승이 아닌 저승에서 사랑을 해볼게요." 하며 사랑의 논쟁에 마침표를 찍고 여지를 두지 않았다. 

지지고 볶는 것이 사랑이라면 충분히 나 홀로 잘하고 있었다. 선택한 삶을 수용하고 극복하며 독립적인 자아를 시간의 견딤 끝에 얻을 수 있었다. 

타인과의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사랑을 갈구하지 않겠다는 것일 뿐. 어느 사랑(어느 결혼)이나 불행은 존재한다고 여전히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어느 결혼이나 모양 다른 불행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나 자신을 여전히 모르는 것은 아닐지 의심이 들 때마다 미쳐버리는 나를 그때마다 인정했다. 


"어떤 사람이면 좋겠어?"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리던 어느 날 나 자신도 그 모습에서 또 변해있음을 알았고, 어떤 사람이라는 그 말은 모호하고 애매하고 우매하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면 좋겠다가 아니라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밑도 끝도 없이 '신뢰'라는 단어를 느낄 수 있게끔 종을 울리는 그와 내가 되면 모를까. 

마음 속 장애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저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알래드 보통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여러 글에서 나의 생각을 반추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바람은 꼭 그 부분이 나의 결핍인 것 같고, 그 부족한 부분을 어떤 사람으로 채우고자 하는 욕심은 아닐지 반문하게 되니 난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알기를 원했고 좀 더 솔직해지기를 원했다. 

그 솔직함이란 내게 있는(나만 아는) 심리적 장애 혹은 미친 부분인데, 이걸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사람인가, 왜 내 마음에 그런 장애가 생겼는지, 왜 어느 한쪽이 미쳐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다른 누군가로 이 부분이 더 악화되거나(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니면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흔한 말처럼 완화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내가 어느 부분을 힘들어하는지, 왜 비 오는 날이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이상한 행동을 하는지, 무엇을 불편해하고, 왜 그 부분만 건드리면 화가 나고 슬픔이 차오르는지...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있고, 나도 그가 어느 부분에서 돌아버리는 사람인지 들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이면 좋겠다는 애매한 말은 다른 부분을 간과할 가능성이 커서 위기가 닥치면 서로의 태도로 까무러치게 놀라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 하며 쉽게 뒤돌아 설 수 있다. 

서로의 숨겨진 미친 점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이전에 설명할 수 없는 호감과 관심이 작용해야 하니 이건 인간의 의지로만 되는 영역이 아니지 싶다. 미래가치, 존재가치, 자기반성 혹은 자기 성찰, 현재의 생각, 성적 친밀감 혹은 성심리(이건 또 뭐 이리 중요한 요소인지 나이가 들수록 대화 소재에서 빠지지 않는다) 인간의 요소엔 수많은 주제가 있는데 이것은 어찌 알아내야 하는 것인지 난감하다. 부딪쳐봐야 안다고 얼버무리고 있긴 하지만...... 또한 이런 것보다는 외모와 직업, 그 사람이 가진 숫자나 표면적인 걸로 판단하고 어떻게 보이는지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현대 사회에선 그 사람을 발견하는 게 더욱 어렵다고 느끼니 나의 결핍과 미친 부분을 드러내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이 정도 되면 어떤 사람을 찾는 게 점점 희박해진다. 사람의 모든 것- 가치, 생각, 성격 등이 모두 건강하기란 어렵지 않나. (쓰다 보니 점점 비관적이 되는 듯 하지만 밑바닥엔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내게 다시 사랑을 권하는 사람들의 말엔 공통점이 있었다. 어딘가(도대체 그곳이 어디야?)엔 너와 맞는 좋은 사람이 있다는 올드패션드한 말과 그래도 인생에서 최고는 함께 사랑하는 삶이지 않겠냐는 아름다운 말로 나를 또 현혹한다. 

" 꼭 누군가를 다시 사랑해 봐. 그럼 네가 이전에 받은 사랑을 느끼고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사랑을 하면, 살아오는 동안 사랑받은 기억이 떠오르고, 유일한 '나'는 다시 존재가치를 느끼며, 결국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임을 깨닫게 되니 이것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라는 말엔 동의한다. 

 사랑이 무엇일까. 각자 정의하는 사랑이 있겠지만, 난 내가 마주하는 그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크다면 비로소 사랑이 아닐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래서 맞잡은 손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수많은 사랑 이야기가 나를 지나갔다. 옳은, 때로는 아름다운 사랑을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와는 거리가 멀다며 부러워하였고, 그른 사랑으로 끝나버린 이야기를 알게 되면 그래, 사랑의 민낯은 이런 거였지 하며 체념하였다. 위안과 동경을 느끼게 하던 그들의 사랑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뒤섞인 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어떤 형상을 원했을까? 좀 더 단단하고, 좀 더 유연하면서 자유롭고 싶었다. 그럼에도 배고팠다. 마음속 허기가 느껴질 때마다 나는 사랑을 떠올렸다. 그 허기를 달래는 것이 사랑이라면! 

최고의 사랑이 삶을 충만하게 하는 가치라면 죽기 전에 그 사랑을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실패한 사랑의 흔적만 남은 난 사랑하는 방법을 잊었을까. 인간의 존재 이유가 사랑이라는 말에 설득당했을까. 난 상처받을 수 있는 그 길목에 들어서고 싶다. 


강바람이 후끈하더니 시원해졌다. 온탕과 냉탕을 수없이 오가며 열정과 냉정 사이, 온정이 무엇인지 가혹하게 알려주는 것이 사랑이라 여기니  옳고 그른 그들의 사랑이야기를 찾아다닌다.

나는 내게, 때로는 그들에게 묻는다. 


" 우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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