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하 Mar 16. 2022

나의 진짜 큰엄마는 아닙니다

한줄기 빛과 같은 인연

"큰엄마! 저 왔어요~!" 

심호흡을 하고 큰소리로 기척을 내니 문 안쪽에서 큰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다. 2년 만에 큰엄마 집을 찾았다. 집 앞에 주차를 하고 들어서니 봄을 기다리는 노란 잔디 위에 새하얀 눈이 곱게 덮여 있다. 크고 작은 근사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타운하우스는 동화 속 장면의 집처럼 고요하고 평온하다. 한 걸음씩 내딛는데 설레는 마음이 절정이다. 그런 내게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통창이 반갑다 한다. 

"그래~ 정아. 어서 와!" 문을 열며 반겨주시는 큰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어지럽던 마음이 포근해진다. 가끔 바람이 쐬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속사정을 쏟아내고 싶을 때, 혹은 사람의 정이 그리울 때 나는 큰엄마를 떠올린다. 찾지 않아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위안이 되는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등대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운전하는 길에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어디 가고 있냐는 말에 큰엄마 댁에 가고 있다고 하니 그 인연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냐고 놀란다. 그렇다. 애틋하고 눈부시게 이어지고 있다. 내 아들이 이제 17살이 되었으니 딱 그만큼이다. 임신 중에 몸과 마음이 괴로워 큰엄마 집으로 가서 쪽잠을 자고 온 적도 있다. 숨 쉬는 것조차 눈치를 보던 시절 탄탄한 나무 기둥과 가지에 마음껏 기댄 싱그런 초록잎 같은 인연으로 여겼다. 그러면서도 스산한 가을바람에 툭 떨어져 나가는 마른 나뭇잎처럼 행여나 행운이 다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내게 이런 큰엄마가 존재한다고 함부로 소리를 내지 않았다. 


여동생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경황없는 장례를 치른 후 우린 각자 슬픔에 빠졌다. 엄마는 바람소리에도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흐느끼고, 늦둥이 동생은 현관문 종소리에 혹시나 누나가 살아 돌아오진 않을까 방문을 닫지 못했다. 큰 딸인 나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어 엎친데 덮친 격이었으니 내 몸 하나 버티는 것도 어려워 서로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래도 난 출퇴근이라도 하며 타인과 뒤섞여 모래성에 슬픔을 집어넣고 있었기에 아빠는 나이 마흔에 낳은 늦둥이 아들과 엄마를 등 떠밀어 여행을 보냈다. 당시 6학년이었던 막내를 데리고 엄마는 동남아시아 몇 개국을 도는 패키지여행 인파에 영혼을 실었다. 바다의 파도와 하늘의 바람에 모든 걸 내던지고 오면 좋겠다는 아빠의 희망이 어딘가에 닿았을까. 

출국 수속을 하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데 건장한 이십 대의 두 청년이 눈에 들어오더란다. 엄마는 '막내가 크면 저리 멋지고 의젓하게 크면 좋겠다, 내 딸도 대학생인데 살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두 청년을 멀리서 바라만 봤는데, 알고 보니 같은 패키지여행의 일원이었다. 엄마가 싱가포르 어느 해안에서 설움이 복받쳤는지 눈물을 삼키는데 두 청년은 다가와서 엄마를 안아주고 위로하였다. 여행 기간 내내 함께 밥을 먹고 이제 중학교 올라가는 내 동생 손을 잡고 다녀 엄마는 뜻밖의 따뜻함과 위로를 선물 받았다. 엄마는 그저 늦둥이 아들에게 사라진 누나 대신 두 명의 형이 그 자리를 채워줬으니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를 만큼 고마웠다고 그때의 마음을 전했다. 며칠의 여행이 헛헛하지 않아 너무 다행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물넷, 다섯 남짓의 형제는 돌아가서도 연락을 주고받겠다며 전화번호를 받아갔는데 며칠이 채 안되어 두 청년의 부모님이 엄마 아빠를 찾아온 것이었다. 

수원에 살고 있던 분들은 두 시간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와 엄마 아빠를 껴안고 평생 기댈 자리를 내줄 테니 실컷 울어라 하며 의형제를 맺자 하였다. 두 아들에게 당신들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며 어찌 그 인연을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길까, 딸 잃은 슬픔을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겠지만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을 아닐 테니 서로 의지하며 살아보세. 하고 엄마 아빠의 손을 붙잡으셨고, 내 동생과 내겐 큰엄마, 큰아빠가 되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알 수 없다지만,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이 이런 게 아닐까 하며 한참을 의아해하고 믿어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수원이 집이셨는데,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십분 남짓 거리였다. 남동생은 매주 금요일 학교가 끝나면 기차를 타고 수원행이었다. 작은 누나와 늘 함께였기에 홀로 남아 방황하기 딱 좋은 시간, 큰엄마와 큰아빠, 두 형은 늘 동생을 데리고 어딘가로 다니셨다. 입을 거 먹을 것도 모자라 할 수 있는 사랑을 다 보여주셨다. 불안한 가정생활로 애를 가지고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을 못 자는 나도 챙겨주셨는데, 가까이에 언제든 달려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난 견딜 힘을 얻었다. 수원을 떠나 난 엄마 곁으로 내려왔는데, 그 후에도 두 분은 없는 시간을 쪼개 툭하면 우리 집을 북적거리게 했다. 큰집이 아니었으면 우리 집의 슬픔은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상상해보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17년간 큰엄마 댁과 우리 집엔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출산 후 이혼을 하고, 내 아들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막내 늦둥이는 어엿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때 만난 두 청년은 어느새 다 결혼을 하여 아들딸들의 학부모가 되려고 한다. 우린 여전히 얼굴을 보고 살고 삶의 희로애락을 나누고 있다. 

큰엄마는 옛날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린다. 애썼다, 잘했다, 잘 견뎠다 하며 또 좋은 날을 기다려보자며 힘을 주신다.  큰엄마와 한참 수다를 떨고 있는데 큰아빠가 들어오셨다. 

환하게 호탕하게 웃으시는 그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두 손 모아 90도 인사를 하니 꼭 안아주신다. 


"네 엄마, 아빠 걱정 그만하고 이제 너의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아라. 좋은 사람 만나는 것도 필요하니 누군가 만날 노력도 하고!! " 

"큰엄마. 큰아빠 나 보자마자 또 또! 잔소리한다. 아오~" 하며 깔깔거리지만 17년째 비빌 언덕이 되어주신 그 은혜를 어찌 갚을까. 

내 아들과 곧 영상통화를 한다. 공부 잘하고 있냐며, 우리 멋진 손자 대학교 가면 할아비가 최고로 좋은 선물 해줄 거니까 열심히 하자.  파이팅을 외쳐주시니 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사는 게 팍팍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선물을 드린 적이 없어 건강식품을 사들고 들어갔는데 이런 선물이 무색하다. 차에 기름을 넣어주고, 양갈비며 굴비며 잔뜩 싸서 트렁크를 채운다. 돈 몇십만원을 세어 주며 아들 학비에 보태 쓰라고 내 가방에 돈봉투를 욱여넣는다. 


현관문을 나서는데 햇살이 춥지 않다.  작년 내내 잔뜩 움츠러든 채 살았던 내게 큰아빠는 어깨 피고, 자신 있게 살라며 마법의 주문을 걸어준다. 그래 맞아.  봄햇살이 찾아오면 또 나아지겠지.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는 피천득 인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현명한 사랑과 살아가는 법을 전해주신 두 분으로 무너지지 않고 살아갈 삶을 배웠다. 

큰엄마, 큰아빠, 막막했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빛이 되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수만 번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작가의 이전글 쓸모 있는 내가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