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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Mar 15. 2022

쓸모 있는 내가 된다는 것

절벽의 잡초도 쓸모 있어서

정체불명의 질문,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딱히 아무 대답도 안 나올 때가 있다.

열심히 '나'로 살았다고 믿고 살지만 어찌 열두 달 사계절이 온전할까...... 강사 혹은 엄마라는 자아를 뒤로하고 때때로 글 쓰는 사람,  영혼은 자유로운 사람으로 명명하고 싶지만 허울 좋은 말일뿐이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표현이 딱이다 싶을 만큼, 사는 능력을 대변하는 재테크도 제로여서 부를 축적하는 기쁨과 보람을 느껴본 적도 없으니 과연 쓸모 있는 삶을 만들고 있는가~ 하며 회의감이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동네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십 년이 훨씬 넘었다. 이 일이라도 확장하여 돈을 좀 더 벌 궁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들으면 쉽게 지치는 체력과 똑 부러진 사업 능력이 없다며 스스로를 평가절하하여 제자리에서 살 자리만 유지하였다. 

글은 어떠할까? 전과 다르게 마음으로만 글을 쓰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삼십 대의 나는 시시콜콜 스치는 생각을 글로 남겨야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텍스트 몇 줄로 표현을 하면 내 삶이 의미 있고, 쓰인 글로 삶이 더 윤택하고 쓸모 있어진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글로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믿었으니 그 욕구가 쓰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그랬던 내가 글과 거리를 두었다. 시선이 머무르는 모든 것과 모든 곳에 자신이 없어졌다. 생각과 글이 어긋나고, 또 다른 단어에 갇히니 나아가지를 못한다. 쓸모있는 광경은 쓸모없는 문장으로 처박혔다. 그저 마음으로 단어를 그려내기를 한참동안 하였다.


닭 쫓는 개처럼 갖고 있지 않은 무언가를 쟁취할 수 있을 거라고 환상을 가졌을까. 물론 작가가 된 후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축복이었다. 삶이 지체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누군가 손을 잡게 되면 위로와 위안이 스며드니 우린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주변의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거창한 말에 이끌려 아기가 막 걷기 시작한 것처럼 또 다른 세상으로 발을 딛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변화와 성장의 과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성취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과 부딪치면서 지금 가고 있는 길이 과연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살아남기 위한 삶은 이런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가만있으면 아무도 알아줄 리 없다는 냉혹한 말에 부단히 움직이고 싶었지만 1년도 채 안되어 멈췄다. 아니 나가떨어졌다. 자기 계발 상품으로 시선 집중을 유도하는 것이 낯설었다. 내겐 그랬다. 글을 쓰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타인의 삶을 배우기도 하고 그들의 글을 엮어 문집도 만들었으니 뿌듯함이 찾아오기도 했으나 그 길의 나를 확신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중단했다. 난 사람 몇 없는 작은 섬의 삶과 다르지 않은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유지하고 있다. 혈연관계와 학생들, 한 손가락 정도 꼽을 수 있는 지인과 간간히 생존 소식을 전할 뿐이다. 이것이 좀 불안해야 다시 도전하는 삶이 될진대, 어찌 된 것인지 평온하고 안정감을 느끼고 말았다. 친구는 내가 더 동굴로 들어갈까 염려된다며 너답게 활기 있으면 좋겠다고 그녀의 바람을 전한다. 분명 많은 사람들과 연대감을 가지고 좀 더 나은 나를 기대했을 것이다. 동굴로 들어간 나는 그렇다면 퇴보한 것일까?

멋진 작가의 삶, 그러니까 이 말은 돈도 벌면서 글도 더 잘 쓰는 , 쓸모 있는 나를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싱글맘의 생활을 드러내고, 자아를 찾아 떠난 여정은 글이 되었기에 난 글에 기대어 살았던 과거를 사랑한다. 물론 지금의 나도 무거운 머리를 베개에 기대는 것처럼 글에 기대고 글 쓰는 삶을 기대한다. 현재의 글쓰기는 노란 신호등이다. 초록불과 빨강 불 사이에서 깜빡 깜박하는 노란 신호를 볼 때마다 마음의 공간이 줄어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당신은 어떤 글을 쓰세요? 어떤 글을 쓰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이 난제가 되었던 것은 오히려 책을 내고 난 뒤에 벌어졌다. 온갖 잡글(수필이나 에세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두고...)을 쓰는 나였기에, 대답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렇게 그 질문에 답을 하고자 나는 동굴 혹은 무인도의 삶을 자청했다.  내게 쉼과 시간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길을 걸었고, 잠을 늘어지게 잤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날도 허다했고, 어느 날 또 낯선 곳으로 떠나서 나를 내놓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쓸모없는 내가 되는 것은 아닐지, 쓸모없는 삶이 되는 것은 아닐지 답 없고 득없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다 문득 아들을 보는데,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아닌가.

사는 것에 정답은 없다고 했지만, 내가 사는 삶에 확신을 가지면 그 안에 답이 있었다.

아들은 17세가 되었다. 내가 엄마가 된지도 딱 그만큼 되었다는 건데, 난 요즘 엄마로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다.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인간 하나를 키워내는 일이 혹독하다 싶은 날엔 툭하면 '엄마 자리 사표 내고 싶다, 엄마 역할 그만두고 싶다.'는 진심 담긴,  현실 불가능한 우스갯소리를 1년에 한두 번은 했을 텐데, 요즘 들어 엄마라도 안 했으면 나는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하면서 그래, 나는 엄마야. 하며 스스로를 다잡는다.

엄마로 살면서 쓴 글은 좀 더 단단하고 나를 찾도록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것처럼 당신도 그럴 수 있다고 전하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을텐데, 나는 이걸 망각했나 보다.

그저 글은 글로 전하면 될 것을. 

모자란 것 투성이인 나 자신을 오롯이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은 계속해야 한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무엇에 관심을 갖고 행복하고 싶은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말이다.

나는 나를 다시 기다린다. 동백꽃인데 벚꽃이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나를 보듬어주면서 말이다. 엄마로 쓰이면서 쓸모 있는 내가 되고자 좀 더 시간을 가져야겠다. 꼭 내 이름 석자의 자아를 찾지 못한다고 해서 쓸모없는 내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제주 송악산 길을 걷다 보면 우뚝 솟은 절벽을 만나게 된다. 닿을 수 없는 그곳에  매서운 바람을 견디며 거친 바위틈 위에서 자란 잡초도 외로운 그에겐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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