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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AN Aug 23. 2021

붕괴를 주제로 한 시들

무너지는가. 원인은 말할 것도 없다.


안녕하십니까, 제이한입니다. 붕괴를 주제로 한 이주의 베스트 시간이네요.

붕괴는 파괴적인 색깔이 강한 시어입니다. 무너져내리는 건물과 풍경이 대번에 떠오르는, 불안감과 먼지냄새가 글의 분위기를 뒤덮게 만들 수 있는 단어죠.

그러나 한편으로 시상이 그렇게 다채롭지 않은 시어이기도 합니다. 여러 갈래로 나 있는 나뭇가지보다 한 줄기로 뻗어있는 몸통에 더 가까운 이미지죠. 그래서 붕괴는 형태가 급격히 무너지느냐, 천천히 무너지느냐가 변주의 전부입니다. 그 모습을 얼마나 잘 담아내는지가 관건이라면 관건이고요.

단순한 비유로 붕괴를 가져다 쓸 수도 있고 정말 무너지는 양상을 소재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베스트에 뽑힌 글들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같이 살펴봅시다.


1. 아이유100%님의 '붕괴'

https://m.fmkorea.com/3832876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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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절차는 간단했고,

마음은 가벼웠다.


오고 가는 알맹이 없는 덕담

가고 오는 괜찮을 거라는 빈말


굳은 날 머리가 젖은 채

빈집에 돌아왔다


나는 오늘 갈 곳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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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천천히 무너지는 붕괴'가 비유로써 쓰인 시입니다. 무미건조한 인간관계와 일상에 의해 갈라진 사람의 마음을 잘 표현한 글이네요.
정확히는 마모에 가깝겠군요. 모래알갱이가 다이아몬드를 갉아먹듯이 돌려 깎여가는 모습은 확실히 요란한 소리가 나는 붕괴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수수 무너져 내리는 때가 되면, 그제서야 붕괴의 존재를 실감하고 예상하던 '혹시'가 진실이었음을 깨달을 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2. 막나가쟈님의 '젊은 날의 초상'

https://m.fmkorea.com/383195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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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흐트러짐 그 사이

간결한 초침의 소리


어둠에도

나방이 모여들까

숨죽인 이 밤


정신의 아득한 무너짐에

되돌아보는 나의 삶


분침이 시침을 건드릴 때

붙잡은 이력서


해체된 청춘을 탈피하려

식혀진 밤 공기에

뜨거운 담배연기


그저 움직였을 젊음의 초침은

분침을 지나쳤고 시침에 닿아

작동된 다이너마이트


붕괴된 젊음의 기둥이

실패한 이 계획이

헛되지 않길 바라며


재가동할 청춘과

꿈틀댈 자존심을 위해

붕괴된 잔해 위로 피어나기 위해


새벽의 흐트러짐 그 사이

멈추지 않는 초침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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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습니다. 성공을 예고하는 전조와 실패를 예고하는 전조, 길사를 예고하는 전조와 위기를 예고하는 전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전조는 그것을 가리지 않죠.

그리고 붕괴의 전조는 붕괴하기까지 걸리는 모든 시간입니다. 견고해보이는 벽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긴 몇 년 전 겨울, 균열이 육안으로 보일 만큼 커지고 만 세 달 전 아침, 두 눈을 질끈 감고 별 일 아닐거라 부정했던 어젯밤. 마침내 다가온 붕괴.

다행히도 붕괴가 모든 걸 앗아가진 않습니다. 잔해를 빠져나온 청춘에겐 아직 재기의 여지가 있죠. 자신에게 일어난 무자비한 파괴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조건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봅시다. 세상은 누구의 편도 아니니 말입니다. 마침 성공을 예고하는 전조와 출발을 재촉하는 초침 소리가 들려오고 있네요.

호흡과 정서, 구성이 참 좋은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3. 김삼다수님의 '붕괴..'

https://m.fmkorea.com/3828636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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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몇분 일찍 일어나면 기분이 좋을줄 알았는데   

찌부둥하고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나는 항상 아침밥을 먹으며 뉴스를 본다

오늘도 아침도 그렇다

평소 별 감정 없이 보던 뉴스는 묘하게  짜증난다

아나운서는 표정이 없고 기자들은 말이 많다

정치인들은 의미없이 당당해 보인다


빨리 씻고 나가야 되는데 계속 멍하다

'오늘도 성실히'라고 적힌 메모지는 물이 묻어

 글씨가 번져있다


아침의 영등포구청역은 허둥지둥대는 일개미들로 가득해보인다

참...   어릴적 나는 매일 읽던 책에서 보던 위인들처럼

큰 일을 할줄 알았는데

주식 방송보고 있는 빨간 넥타이 맨 뚱뚱한 아저씨 옆자리에 앉아있는 일개미 3호가 되어있을줄은 몰랐다


악재때문에 난리난 주식마냥 사람들이 강남역에서 우르르 내린다

강남의 빌딩은 구름을 관통하는듯 끝이 보이지 않는다

취업 준비할땐 저런 빌딩에 들어가서 일하면 유포리아 있는 사람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빌딩에  들어 가면 왠지 모르게 정신이 없다

오늘은 노을 보면서 집에 가고 싶었는데..


시퍼런 하늘은 잠깐 붉게 변하고는 시꺼매젔다

반쪽짜리 달은 흑색 하늘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높이 솟구쳐있는 빌딩들은 검은 하늘에서 훔쳐온듯 반짝거린다


빌딩 주인이  부럽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한 채로 집에 간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자기전에 맥주 한캔은 해야겠다

지친 하루를 시원한 캔맥주와 함께  마무리하며 오늘을 복기해본다


복기해보면 오늘은 어제와 같았다

그저께는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또 어제와 같았다

그저께는 어제와 같고 어제는 오늘과 같다

이걸 알고 나니 내 좁은 방이 갑자기 달라보인다  

묘하게 위화감이 든다  

수 많은 흰 도화지들 사이에 껴있는 까만 A4용지가 된것같다


갑자기 혼란스럽다

난 성실했다 그것도 지나치게


내 삶에 의구심이 든다



내 삶에 의미 포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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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어떤 물건이 내부로부터 붕괴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일단 구조물이 못 버틸만한 하중이 있어야겠죠. 부실공사가 아닌 한, 뼈대가 부러질만큼 무거운 부담을 건물이 짊어져야 한다는 소립니다.

그럼, 사람이 붕괴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뇌를 과부하 상태로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 글의 화자처럼요. 긴 생각의 끝에는 나름 만족할만한 결과가 있어야 하고, 깊은 고민의 끝에는 합당한 해결책이 있어야 합니다. 둘 다 화자랑은 거리가 멀어도 한참은 먼 단어들이죠. 바쁜 하루의 끝에 행복이 없고 숙고의 끝에 해소가 없습니다. 고민만 안겨다주는 삶의 의미가 더이상 감내할 수없을만큼 많아진 순간, 포화는 붕괴의 시작을 끊었습니다.

외적인 면에선 빼어난 부분이 적지만 호소력 있는 메세지와 높은 몰입감이 글에서 느껴지는 작품이었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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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하기로만 따지면 이때까지 했던 주제들 중에서 제일 가는 단어, '붕괴'의 베스트 시간이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우중충하고 위태로운 시상을 많이 접할 수 있었던 한 주였네요.

다음에도 좋은 작품들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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