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제주도로 3박4일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친한 친구 3명과 함께. 자가용이나 렌트카 없이 버스와 도보로 이동하는 배낭여행이 우리의 이번 모토였다. 그 덕분에 하루 일정을 마친 뒤 숙소에 도착하면 다들 하나같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얻은 것은 아름다운 풍경과 귀중한 경험이요, 잃은 것은 다리의 평안이었다.
피로에 절어 숙소 바닥에 늘어져 있던 우리는 그래도 원래 세웠던 행복한 계획을 위해 건물 밖 캠핑장으로 가서 바베큐 파티를 준비했다. 사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가는 게 힘들었지 그 후로는 순풍만범이었다. 숯불과 씨름하며 힘겹게 고기를 구운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친구 셋은 즐겁게 식사를 만끽했다.
식사가 다 끝나고 숙소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남은 음식과 술로 곧장 2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친구 한 명이 가져온 잭 다니엘 허니와 수제 육포가 안 그래도 신이 난 술자리의 분위기를 한층 더 올려주었다. 안주를 뜯고 잔을 넘겼다. 시덥잖은 얘깃거리를 꺼내서 또 다른 술안주를 만들었다. 몇년이 지나도 기억하는 즐거운 학창시절 이야기였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술병은 맥주 소주 양주 가릴 것 없이 무서운 속도로 빈병이 되어갔다.
주량이 약한 순서대로 친구 둘이 뻗고, 남은 사람은 평소 자주 술잔을 주고받는 친구 J와 나였다. 단 둘이 남은 탓에 말문이 닫힐 사이는 물론 아니었기에 화제가 생각나는 대로 툭툭 뱉으며 대화를 나눴다. 개중에는 진중한 주제도 있었다. 그래도 말소리는 끊어지는 일 없이 건배와의 화음을 이뤄냈다. 이대로 서로 의식이 희미해질 때까지 마시다가 쓰러져버리자. 여행 첫날에 어울리는 마무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아마 J도 그런 마음으로 잔을 들고 있을 것이다.
"근데...요즘은 어떻노?"
여느 때와 똑같은 어조였지만 귀에 꽂히는 느낌이 달랐다. 아까보다 발음이 어눌해진 J는 흐릿하지만 깊은 뜻이 담긴 질문을 내게 던졌다. 아니, 깊지도 않았다. 나는 물론이고 쓰러진 둘을 포함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쉬이 짐작할 수 있는 내용. 세 달 전에 어머니를 잃은 나에 대한 걱정이었다.
"어떻긴 뭐...비슷하다. 그냥 마 살만하다."
"술 묵을 때는 구라 안 쳐도 된다."
나는 살짝 마음이 거북해졌다. J와는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술자리를 함께했고,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더 자주 얼굴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는 서로의 취중진담을 부딪쳐서 나를 거칠게 위로해주었다. 고마움과 슬픔이 동시에 찾아오는 기묘한 경험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감사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 나는 홧김에 '그딴 상투적인 얘기만 할거면 아예 처음부터 꺼내질 마라'는 식으로 소리나 질러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입이 떼어지질 않았다. 대신에 약간 순화된 다른 말이 나왔다.
"구란지 아닌지를 니가 어케 아는데."
대충 농으로 받아치고 잠이나 자야겠다. 기쁨과 슬픔이 섞여 흐지부지된 정신을 겨우겨우 부여잡고 잔을 들어 목으로 맥주를 넘겼다. 차라리 눈물이라도 흘러준다면 훨씬 편할텐데. 기껏해야 코끝이 찡해지는 게 다인 나로선 안타깝기 그지없는 바람이었다. 언제부터 눈에 이런 가뭄이 생긴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J가 꺼낸 다음 말을 듣고 투명한 녹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지랄. 니가 smile 부르는 거만 봐도 다 보인다."
내가 요즘 노래방만 가면 부르는 노래. 전에도 좋아했지만 최근에는 가사가 마음에 깊숙이 와닿아서 좋아하는 노래였다. 나플라의 찰진 래핑과 우수어린 비트, 가족에 대한 사랑이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가사가 한데 어우러지는, 나플라의 유니크한 감수성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따라부를 때는 평소에 풀어지지 않던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는 듯 했다. 그러니 그 모습이 자연스럽게 표정이나 목소리로 티가 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콕 집어서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J가 어림짐작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나를 만날때마다 내 진심을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다시금 눈물이 핑글 돌았다. 알콜로 적셔진 목이 뜨겁게 메인다.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죄 없는 J에게 화풀이를 하려고 했다.
그는 애초부터 상투적인 말은 하지도 않았는데. 알고 지낸지 벌써 10년째가 되는 친구를 진실되게 봐주었을 뿐인데. 내가 마음을 닫았다고 해서 그 역시 마음을 닫은 건 아니었는데. 인간관계를 상투적으로 대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나였다.
괜히 왼손으로 얼굴을 비벼본다. J가 내 녹을 알아차리기 전에. 어차피 그는 이미 창문 밖의 달을 사선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멋쩍어진 나는 실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긍정적인 답을 돌려주었다.
"티 많이 났나."
"존나. 그래도 다행이다."
"그게 그만큼 명곡이라는 소리 아니가? 내는 잘못한 거 없다."
"사람이 울 때는 울어줘야 웃는 때가 오는거다. 혼자 있을 때 그 노래 들으면서 울고 싶을 때 펑펑 울어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