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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AN Mar 13. 2022

이 주의 시들-공백

텅 비었어. 너도, 나도.


안녕하십니까, 제이한입니다. 공백을 주제로 한 이주의 베스트 시간이네요.


공백은 글씨나 그림 사이의 빈 자리, 더 나아가 비어있는 상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시각적으로 보나 심리적으로 보나 공백이란 개념 자체는 사람에게 붕 뜨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죠. 여유와는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성질입니다.


여유가 사람의 마음을 편히 쉬게 한다면, 공백은 평소에 갈무리하지 못했던 잡생각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좋든 나쁘든 우린 그 공백을 의식하고 다시 채울 때까지 생각을 정리해야 하죠. 받아들이는 건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고요.


이번 주 베스트에 오른 글들은 어떤 공백이 담겨 있을까요. 함께 보러가시죠.




1.파스타벌레님의 '길을 걸으며'


https://m.fmkorea.com/4391466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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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느끼는 감정.



마음속이 텅 빈 것 같구나.



조금 더 어렸을 적엔 이 감정이 좋아서



이 마음을 재현해 보려고 그렇게 애썼건만



지금은 한없이 고통스럽기만 하구나.



조금씩 느껴지는 살짝의 쾌감도



다시 나의 우울에 젖어 사라지는구나.



나의 이 마음을 어찌하면 좋으려나.



나의 이 감각을 어찌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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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공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사실 좋고 나쁨을 가르는 간단한 척도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 나한테 좋은 일과 나쁜 일 중에서 어떤 게 더 많이 일어났나'지요.


묻히는 생각은 사고의 빈도에 정비례해서 많아지는 게 보통입니다. 좋은 일이 많으면 공백이 생겼을 때 떠오르는 것은 자연히 좋은 일일 것이고, 나쁜 일이 많으면 그 반대겠지요.


화자의 방법론은 어릴 때와 똑같았습니다. 그걸 제외한 모든 게 바뀌었을 뿐.


잘 읽었습니다.



2. 판콜님의 '공백'


https://m.fmkorea.com/4397676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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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할 때는


공중에 있는 듯


내가 없는 듯


어쩌면


삶은 무가치한 듯도 합니다



항상 비어있던 옆자리에


채워있던 나를 생각하며


어쩌다 남아 있던


담배냄새와


한 줌의 시


한 줌으로 흩어지던 아버지




당신과 나


많이 아파했었습니다



핸들이 시간을 훑는 동안


잠깐 새벽을 두고 간 당신,


도착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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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생각을 도중에 그만두는 것은 원래부터가 어려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생각이 공백 사이에서 떠올라버리면, 생각에 사람이 매몰됩니다.


소중한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에 드문 드문 드는 무신경한 염세. 하지만 소중한 이의 흔적은 그런 자신을 간접적으로 꾸짖습니다. 이제 더는 세상에 없을지라도.


새벽은 화자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인생의 무가치함을 설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어림도 없죠. 그의 가슴 속에 아버지의 아픔이 선명하게 녹아있는데.


잘 읽었습니다.




3. 시랑꾼님의 '동백'


https://m.fmkorea.com/4404077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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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사랑을 지녔던


지난 겨울의 나를 마주한다



흰 눈밭 위에 뒹굴거리는


누렁개 한 마리를 보고선


너와 하던 눈놀이를 떠올린다



곳곳에 하우스의 비닐조각들이


올렛길의 매듭처럼 휘날리며


휑한 바람만 불던 그 눈밭



나비처럼 하고선 누워있던


너의 머리위로 앉은 동백꽃잎과


그걸 가져다 입술 위에 얹고는


붉은 단어들을 말해보였던 나



그저 솜여우같은 너의 미소가


영원하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눈이 더 오면


너가 온몸으로 만들었던


인간나비는 사라지고,


나는 니 흔적이 파묻혀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집으로 돌아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어


묵혀둔 귤차를 타서 올려두고


하염없이 창문만 응시하며



열렬한 사랑을 지녔던


지난 겨울의 나를 지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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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공백을 이용하면 과거를 한 편의 영화처럼 회상하는 것도 가능할 겁니다. 인위적으로 기억을 끄집어내지 않고 자각몽처럼 부드럽게 말이죠.


그리고 화자가 펼친 기억은 지나간 겨울날의 애수였습니다. 머릿속이 사랑으로 가득 차서 공백이 생길 틈도 없이 상대에게 매진했던 나날. 지금 화자가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회상하는 것이 오히려 꿈같이 느껴집니다.


마주한 과거의 자신과 합쳐지면 좋으련만. 현재를 사는 그는 과거를 지나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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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베스트는 어떠셨나요. 생각이 멈추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 반하는 단어, '공백'이 이번 주제였습니다.


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비우는 휴식과는 다르게 공백은 정말 불현듯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걸 마뜩찮게 보면 되겠냐는 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가.


다음 주에도 좋은 작품들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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