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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AN Aug 23. 2020

전상국-<아베의 가족> 감상문

분단문학, 혈연의 진득함

<아베의 가족>은 1979년 발표된 전상국의 중편 소설이다. 미국에 이민을 갔던 '나(김진호)'가 한국에 놓고 온 '아베'라는 가족을 찾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 일어나는 일을 서술한 것이 이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후기 분단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남북 간에 있었던 일과 분단의 상황을 한 가족의 모습에 투영하여 보여주는 구조는 그때 당시 사람들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베의 가족>은 인물에 큰 비중을 집중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은 지난 2주간 썼던 형식과 다르게 인물상을 중심으로 작품을 탐구하고자 한다. 본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아베라는 남성이다. '나'의 어머니가 첫 남편을 만나 얻은 첫 자식인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있던 인물로 '나'를 비롯한 어머니의 다른 자식들은 모두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아베는 그들과 같은 가정의 구성원이었지만 결코 가족이 아니었다. 흐르는 피도 달랐거니와 부모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를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베는 극의 내용에 영향이 갈만한 언행이나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베'라는 한 단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베는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존재하기는 피동적으로 존재하나 극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아베에 대해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주인공 '나'일 것이다.

그러니 주인공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주인공 ‘나’는 겉보기에는 아베를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여기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그렇게 틀린 것도 아니다. 그는 가정의 애물단지인 아베를 싫어했으며 자신과 가족이 보낸 한국에서의 나날을 망친 것은 다름 아닌 아베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주인공의 심리는 미국에 온 뒤 마음이 죽어버린 어머니를 목격하면서부터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 변화를 잘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나'의 인물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나'는 미국으로 건너가 일자리도 얻고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게 된 인물이다.(적어도 한국에 있을 때보단 형편이 나아졌다) 소위 '아메리칸 드림'에 심취한 인물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심취는 일종의 사대주의적 우월감이 되어 겉으로 드러나고 있다. 작중 초반부에서 그는 토미가 가진 차별 없는 인식이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자존감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그 사실에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자기 역시도 토미나 그런 종류의 백인들이 항유하는 소속감과 비슷한 감정을 갖는다. 후반부에서 친구가 '나'를 비꼴 때 욱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여기서 기인한다. 한국으로 다시 올 때 빵빵한 자금과 막대한 자존감을 얻게 된 그는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한다. 버스 매표소에서 만난 여대생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여관에서 일하는 남자아이에게 과한 팁을 주기도 한다. 그날 밤 술집에서 만난 여종업원에게 돈을 주고 그녀의 몸을 하룻밤동안 탐닉하기도 한다. 미국에 가기 전 친구들과 같이 투합하여 만든 서클을 해산시키기도 한다.

종합하자면 그는 전형적인 '속물'이다. 서 있는 곳이 바뀌자 보는 경치도 바뀌고만, 그리고 그 사실을 아무런 가감 없이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 아베는 '치부' 그 자체였다. 아베를 임신하고 있는 동안 군인들에게 윤간당한 그의 어머니와 그가 본능을 억누르지 못해 범한 '성애'라는 이름의 여성은 어딘가 닮은 점이 있다. 적어도 그한테는. 그에게 아베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송곳이자 자신의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망친 주범인 것이다. (이는 남북 전쟁이 남긴 상처라는 함의를 제하고 필자 나름대로 파악한 소재의 뜻이다) 그랬던 그는 마음이 죽은 어머니를 보면서 처음으로 아베를 찾고 싶어 한다. 미국으로 올 때 방해가 될 것이라 여겨 쓰레기처럼 버리고 만 아베를. 그럼 이쯤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왜 그는 아베를 찾으려는 걸까?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마음속의 상처를 낫게 하려고? 물론 그것이 이유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들어가 보자. 그는 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은 것일까?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는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남들보다 더 낫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심리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나'는 가난한 유년기는 물론이고 미국에 건너가 군인이 된 지금까지도 창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지금, 인생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하겠는가? 바로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다시 어머니가 예전과 같은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그는 한국인 '김진호', 미국인 '김진호'가 아니라 '인간' 김진호가 된다. 언뜻 보면 이 작품에서 가장 인간답지 않은 인간은 아베이나 그 속내를 살펴보면 '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어떤 요소가 결여되어 있는 ‘병신’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진호'는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분단 문학이 아니다. 오로지 분단의 아픔과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만 인물을 설정하고 이야기의 틀에 짜 맞춘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다 똑같은 함의를 하나씩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만 보아도 그렇다. 그는 자식인 아베를 사랑하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어머니가 남긴 수기의 추측대로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털어내기 위해 아베를 수단으로 이용할 뿐이었다. 이는 전쟁이 평범한 사람에게 주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은 본인을 위해서라면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도 속일 수 있으며 사람이 역사적으로 소중히 지켜온 보편적 가치인 사랑도 쉽게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베의 가족>이 단순히 소재를 역사적 프로파간다로 잡았다면 이런 깊은 내용은 절대 나올 수 없었다. 이러한 복합적인 구성이 이 작품을 시의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더욱더 풍부하고 훌륭하게 만들어주었다. 훌륭한 작가의 구상이 낳은 위대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아베의 가족>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날 때부터 정신이 박약한 갓난아이 같은 어른과 전쟁으로 인해 평범성을 빼앗기고 만 소시민들, 이 중에서 진짜 병신은 어느 쪽인가? 하고, 생각의 여지를 주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작가는 '나'의 가족들에게 주인공다운 능력을 주지 않고 모조리 평범한 인물들로 설정했다. 그런 탓에 작품 내에서 시련을 궁극적으로 극복해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정희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흑인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나'는 어머니의 수기에 나온 표현과 똑같이 칼로 그들을 썰어 죽이고 싶어 한다. 나라가 바뀌어 사정이 조금 편해진 것일 뿐 누구도 기존에 있던 숙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대중은 특별한 능력이 없는 소시민들이다. 남다른 재주로 시련을 타파할 깜냥도, 재치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 우리들에게 <아베의 가족>은 시대에 남을 교훈을 주고 있다. 출간되었을 당시의 사람들에게나, 지금의 우리들에게나.
'너희들은 안 그럴 것 같아? 시대가 달랐을 뿐이야, 이건 너희들은 초상일 수도 있었어. 똑바로 현실을 직시해.'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이 수업을 통해 분단 문학을 여럿 접하고 나니 더 확고하게 드는 생각이 있다. 문학은 나라마다 담고 있는 정서가 다르다는 것이다. 일본 문학은 다 읽고 나면 여운을 준다. 프랑스 문학은 다 읽고 나면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한 애틋함을 준다. 러시아 문학은 철학적인 고뇌를 주고, 중국 문학은 인간관계에 관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나라 문학은, 그중에서도 특히 분단 문학은 다 읽고 나면 가슴 어딘가가 뻐근하게 아려온다. 이 뻐근함의 이름은 붙이기 나름이리라. 누군가는 안타까움, 누군가는 한이라고 부를 것이다. 나는 이를 작가의 영혼이라 부르고 싶다. 독자가 작가가 쓴 텍스트를 읽을 때, 독자와 작가는 심리적 교감을 한다. 텍스트에 불어 넣어진 작가의 가치관과 관념, 영혼이 읽는 이의 가슴에 맞닿는 것이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다음, 닿아 있던 영혼이 떨어지면서 찾아오는 느낌이 바로 뻐근함이라는 말이다. 굉장히 비과학적인 낭설이지만 난 이 이론을 믿고 싶다. 그게 아니면 문학의 힘을 설명할 도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전의 두 작품과 비교해 분량도 많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소설이었다. 이제 길잇값을 톡톡히 하는 이 <아베의 가족>을 뒤로 하고 글을 줄이도록 하겠다. 다음 감상문에서 또 만나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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