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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로의 시간여행

스무 살로의 시간여행    

원 지우    

  핸드폰도 삐삐도 없던 시절, 우리들의 스무 살.

  군대에서 연애편지를 받듯이 남학생들은 여학교의 학보를 받으면 우쭐했다. 나도 같은 동아리 친구들에게 가끔 학보를 보내주었다. 그 중 친한 몇 명은 펜팔 하듯이 종종 편지를 하기도 했다. 문학소녀도 아니었던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편지를 써는지 모를 일이었다. 

  내가 다녔던 동아리는 특이하게 대학교 일학년 때만 활동을 해서 2학년이 되면 매주 만날 일이 없어졌다. 그러던 중 한 남학생과 따로 만나게 되었다. 사귀었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사이. 요즘 말로는 ‘썸타다’정도가 맞을 것 같다. 그 때는 적절한 말이 없었다. 그저 조금 만나다 만 그런 사이였다. 지나간 다이어리를 찾아보니 한 학기 정도 띄엄띄엄 만났다. 나는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에 관심이 없어서 우리 관계는 더 발전 되지 않았고 그냥 친구로 남게 되었다. 

  다행히 그냥 친구라서 아직도 가끔 연락을 하거나 SNS로 그 친구의 소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전 그에게서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

  “네 편지 아직도 가지고 있어”

  “뭐라고?”

  “대학교 때 네가 보낸 편지들 말야. 엄마 집 어딘가 있을거야.”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갔고 남은 짐들은 어머니가 잘 챙겨서 창고 어딘가에 보관했단다. 그 후로 35년 동안이나 상자 안에서 고이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그 편지들을 찾아오라고 친구를 조르기 시작했다. 일 년도 넘은 것 같다. 얼마 전 소식이 없던 그에게 연락이 왔다

  “너 줄게 있어. 밥은 네가 사라”

 밥 사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나는 두툼한 편지 꾸러미를 상상하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좀 늦는다던 친구는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자 그는 안주머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냈다. 다 찾아오라고 그렇게 사정했는데 달랑 한 통이었다.

  다섯 통 정도의 편지를 찾았는데 다시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줄 수가 없더란다. 더 읽어보고 줄까말까 생각해 보겠다고. 

  욱하고 욕이 나올 뻔했다. 연애편지도 아닐 텐데 헛소리 하지 말고 당장 찾아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가져올 때까지 달달볶을 거라고 협박도 했다. 편지를 볼모로 나를 약 올리더니 끝에는 조금 미안해 진 기색이었다. 

 별 내용도 아닐 텐데 뭐가 그리 재미있냐고 물으니 그때는 자기가 이해를 못 한 것 같다고 했다. 자기가 바보였다고. 무슨 내용인지 내가 썼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뭘 이해 못했다는 걸까. 더 궁금해 졌다.

  할 수없이 한 통의 편지만 들고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씻기도 전에 편지부터 펼쳤다. 다른 날짜의 편지지 세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라기보다는 일기장 같았다. 그 날 있었던 일이나 친구들 얘기가 적혀 있었다.

  스무 살의 내가 그 날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달콤한 내용도 없고 슬픈 일도 없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내 앞에 스무 살의 내가 앉아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내가 만져질 것처럼 아련했다. 그저 호기심에 달라고 했던 편지 한 통이 나를 35년 전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했다. 잠시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리고나서 생각했다. 나머지 편지들도 빨리 찾아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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