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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Dec 03. 2019

(핀란드 일지) Finland - Tampere

그들 속에 가만히




2019.07.23


2.5유로 하드 용지엔 알록달록 무지개색이 가득.

(가장 좋아하지 않는 빨랑과 노랑이 잔뜩... 후아)

어릴적 색종이를 본 이후 이렇게 알록달록 모든 색이 묶음으로 되어 있는 것은 처음이다.

녹색과 그 보색의 작은 포인트만 좋아하는 나는 색종이도 빨강은 쓰지 않았었는데!

흑백의 종이만 있으면 했는데 원하는 종이는 10유로가 훌쩍 넘어버리니 어쩔 수 없다.

작은 종이 위에 나의 우꾸와 묭이 토미팬더를 조금씩 그려 넣었다.

차마 다 가져오지 못한, 아끼고 좋아하던 종이에 그려 넣지 못함이 아쉽지만

동물 캐릭터를 그리는 것은 나를 내내 웃게 하는 행복한 순간이다.

유치원 이전부터 동물만 캐릭터로 그려 앨범을 만들었을 정도이니.


나의 유일한 장점이라? 고 할만한 것은 

뭐가 있든 간에 빨리 적응하고, 없는 와중에 뭔가 뚝딱 만들어낸다는 것이려나?

인형과 장난감이 없을 때에도 만들어서 놀고

입을 옷이 없을 때에도 만들고 리폼해서 입고

먹을 것이 부족할 때에도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먹고

생필품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이 없을 때에도 뭘 어떻게 해서든 만들고 활용해서 써 왔다.

어려서부터의 또래 친구들과 공감할 수 없었던 많이 다른 환경과 결핍이 그런 나를 만들었다.

아직도 스스로를 채찍질만 하고 너그럽지 못한, 내가 보는 그런 나의 유일한 칭찬할 만한 점이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어디서도 잘 살 거라는 것이지 않을까.


지난날 아침 장 보러 지나가면서 일찍부터 물건을 깔고 자리를 잡고 계시는 분께

아무나 참가할 수 있는지 여쭤보고서야  나온 오늘.

담당자를 직접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갑자기 참여 못할 수도 있겠다.

참가비도 못 건질 수도 있겠다.

해가 너무 쨍해서 무섭다.

이런 마음으로 짐을 챙겨 집을 나서 나무 태그에 자리를 잡아본다.

이곳은 농산물을 파는 재래시장 옆 공간에서 열리는 중고마켓이기 때문에 

그림 같은 것도 가능한지, 외국인도 참여 가능한지 참가비가 얼마인지 몇 분의 셀러 분들께 여쭤보니 

모두 오케이라고.

그런데 중고가 아니기 때문에 한 테이블에는 9유로, 반테이블은 5~6 유로라 해서 

듣고 온 것보다 비싸구나...  자리 값 날리면 어쩌냐! 싶었는데 

중고를 팔러 온 아주머니 한 분이 자기랑 테이블을 나눠쓰면 2.5유로만 내면 되니 옆을 쓰라 하신다.

끼이또스!

참으로 누군가 곤란한 상황을 두고 보지 못하는 친절한 사람들이다.


재래시장이라 아침 6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열리는 시장.

8시가 넘어 나왔는데 당연히 좋아 보이는 자리들은 꽉꽉.

원단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엽서를 늘어놓으려는데 바람이 쐥쐥~~~

엽서가 아름답게 날아다닌다.

홍대프리마켓 등 내가 몇 년간 참여했었던 마켓들이 생각났다.

내 병뚜껑 재활용 주얼리와 레코드 시계는 무게 덕분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레코드 시계 정도만 잘 고정시키면 됐었는데 주변 다른 그림 작가분들의 그림과 엽서 등이 

휘휘 날아다니던 모습!

아. 내가 연장질 제품만 갖고 나오다가 이렇게 솜털 같은 건 처음이구나!

원단 같은 디피 용품도 짐 늘이기 싫고 너무 비싸서 사 오지 않았는데 바람에 쌩쌩 날리니

그나마 혹시 챙겨 온 마스킹 테이프로 잠시 고정해 놓는다. 

디피고 뭐고 색의 조화고 뭐고  가져온 가방과 다이어리 이것저것 짐들을 꺼내서 누르기에 바쁘다.

토미. 마켓에서 이렇게 거지같이 디피해 보기는 처음이야.

디피가 넘 부끄럽다. 토미.

애들이 불쌍해 보여.


영 잘못 나왔나?

얼핏 시장을 다닐 때는 이 정도일지 몰랐는데 노인들의 놀이터다.

셀러들도, 구경하는 사람 들도, 빈자리에 앉아 쉬는 사람들도.

그리고 중고 시장이 엄청 활발히 운영되는 핀란드답게 당연히 모두 중고다.

나와 토미가 가장 어리고, 우리만 외국인이고, 우리만 만든 걸 늘어놓았다.

허허허.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많고,  백발의 할머니들이 만져보고 둘러보기도 하시고

가방과 레코드 다이어리를 파는 제품인 줄 알고 만지작 보는 사람들도 있고...

나와 녀석들을 보는 사람들보다 내가 그런 사람들과 주변을 풍경을 보느라 바쁘다.

홍대 지옥이 생각나는 쨍쨍함 속에서도 천천히 걷고, 천천히 보며 별거 없어 보이는 물품들 사이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소중히 들고 가는 사람들.

가만히 앉아서 몇 시간이고 그냥 앉아서 볕을 즐기는 사람들.

사람이 많으니 때로 모여 다니는 까마귀와 갈매기와 참새.

끊임없이 불어와 엽서를 날리는 바람.

그리고 빈티지 트렌치를 입은 나는 난생처음으로 새똥을 코트에 잔뜩 묻히고, 손에도 발라보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갓 싸 놓으신 자리가 마침 내 자리라서 지나가다가 멋쟁이 코트에 쓱쓱 발라진 것이다.

허허허


테이블을 나눠쓰는 아주머니는 갖고 나온 중고를 늘어놓고 뜨개질을 하시며

계속 드문드문 말을 거신다.

또박또박 영어로 말을 건네 주신  덕분에 내 옹알이 영어로도 짧은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친절하고 영어를 잘 구사하는 사람들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맞춰주신다는 것이 늘 감사한 일이다.

그 와중에 몇 마디 공부한 핀란드어를 섞어서 대화하니 아주 칭찬까지 아끼지 않으신다.

아마도 내가 한국에서 겪고 다녀보던 그런 손으로 만든 창작품을 파는 프리마켓이 아니라

한국으로 치면  '쌍문동 골목시장' 같은 곳에서 외국인이 그림엽서를 파는 느낌일 것이다.

그럼 어떠랴.

뭔가 이런 행위들은 다른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더라고 큰 만족감을 준다.

핀란드에서는 무언가를 이상하다는 듯, 신기하다는 듯 보는 사람들이 없다.

어디나 그랬으면 좋겠듯이 

그냥 모두 결국 연결된 한 존재라는, 뭔가 외모의 다름으로 구분짓지 않는 느낌.

나도 모든 것들 더 그런 마음과 시선으로 대하기를 바라며 오늘도 작고 큰 것들로부터 배운다.


 따라오지 말라는데 기여코 노트북 들고 따라온 토미는 쨍쨍과 바람 덕분에

일을 하지 못하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고

나도 충분히 만족했으니 더 버텨서 될 건 아니다 생각해서 1시간 반을 남겨두고 자리를 접었다.

홍대프리마켓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자리를 털고 새똥묻는 빈티지 트렌치 멋쟁이는 바로 앞 마트에서 맥주와 과자를 사들고

집 앞 작고 조용한, 그늘진 우리의 아지트 벤치에서 맥주를 마시며

마치 완판하고 큰 일 한 것 마냥 큰 만족감을 느끼며 서로를 치하한다.

참 돈벌이는 못해도 노는 건 기가 막힌 짝꿍을 둔 토미가 

오늘따라 마음이 아리게 고맙고, 안쓰럽게 느껴진다.


융통성도  없고, 타협도 없는 나라도

그래도 계속 계속 하다보면

그래도  작고 동그란 눈사람 하나 만들고 갈 수 있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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