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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Dec 29. 2019

(핀란드 일지) Finland - Helsinki

내맡기다



대표적인 슬로건이 '산과 호수'의 나라인 핀란드. 이름도 예쁜 수오미.

탐페레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조금만 걸어 나가면 숲과 호수가 지천에 널려있을 거라 생각했었지만

모든 기대를 와르르 무너졌었다.

공원이 많고 40분이나 1시간쯤 걸어 나가면 작은 호수와 아주아주 작은 숲이 펼쳐져 있긴 했지만

정말 광활한 숲과 호수를 보려면 대중교통으로는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뚜벅이가 갈 수 있었던 곳은 동네 공원과 작은 호수 정도라

바다보다는 산을 좋아하는 나는 숲에 대한 갈증이 점점 심해졌었다.

의외로 수도인 헬싱키에서는 국립공원 등 더 다채로운 자연을 대중교통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지도를 펴 놓고 녹색과 웅덩이가 있는 곳은 무조건 검색해서 갈 수 있는 곳인지 추려내는 것이 

탐페레 살이에서의 마지막 재미였을 정도다.

그중 주변 2시간 이내의 숲 중 가장 접근성이 좋은 눅시오를 가는 것이 헬싱키에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었다.


헬싱키도 비가 오락가락, 눅시오가 있는 에스포도 예보상에는 매일 비가 연속이다.

비에 환장하지만 비가 어느 정도 내리는지 예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거의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눅시오의 길이 어떨지 초행자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엉터리 예보지만 며칠을  살펴보았다.

언제 어디서나 국적불문 엉망진창 바보 일기예보.

일주일째 헬싱키에 비가 온대서 두근두근 행복했는데 미치도록 쨍쨍하다.

에스포도 마찬가지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냥 바로 오늘 출발하기로 한다.

굶어 죽지 않게 새벽부터 아침 식사로 바나나, 점심으로 현미밥에 커리와 양배추 김치, 샐러드 도시락을 챙기고

혹 추울 수 있으니 따뜻한 카모마일 차도 스텐 텀블러에 가득 넣고 아침 일찍 나선다.

헬싱키 기차역에 도착해 거금을 들여 ABC존 데이 티켓을 구입한다. 

전철처럼 생긴 에스포행 기차를 타고, 에스포에서 버스를 타고 쭉쭉 숲길을 달리는 중에 비가 온다.

후드득 창문을 갈기는 것이 비가 맞다.


오늘은 '해님 방긋'으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역시 일기예보 최고.

헬싱키에서도 폭우 정도의 비가 아닌, 아 비 오네. 정도의 강수량이라 에스포도 헬싱키와 가까운 곳이니 

조금 내리다 말겠거니 싶다.

푸두두두두두두!!!!!!!!

폭우다. 걱정을 부르는 폭우가 내리다가 바로 그친다.

잔뜩 걱정을 하던 토미도 비에 우중충하고 맑아진 길과 쨍한 숲의 색에 반한 나도 

우리가 미리 정해 놓은 탐방로의 초입에 도착해서 바나나를 먹는다.

먹고 신나게 입성해 볼까? 인포에서 다시 좀 점검해 보고!

그런데 인포가 있다고 되어있는데 없다.

핀란드에 2달째 살다 보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별다른 표시도, 화장실도 없다.

차가 다니는 작은 길과 그냥 숲이 있을 뿐이다.

나고 자란 한국에서의 타인과 사회에서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던 나조차도 이런 때에는 문득

아주 잘 만들어진 시스템과 울타리 안에서 편리하게 살고 있었음을 느끼고 섬뜩할 때가 있다.


작은 팻말이 하나 있어 보니 우리가 걸어보려는 곳의 길 이름이 맞다.

나무가 촘촘히 가득 차고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길이 보이지 않아 잠시 흠칫! 두려움 찾아왔다.

핀란드에 와서는 내가 산과 들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 이후에 얼마나 정제된 자연만을 접했었는지 

종종 느끼고 있다.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서니 그 초입의 순간부터도 그냥 입을 다물 수 없는 감탄스러운 풍경의 연속이다.

토토로 숲에 입성한 메이의 심정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냥 걸어 들어가니 작은 흙길, 나무길 옆으로 온갖 자연의 친구들이 활짝 열어준다.

처음 나와 같이 멈칫하던 토미 역시 이런 풍경이 처음이라며 감탄을 자아낸다.

사사삭 가장 시끄러운 자작나무, 길게 뻗는 잣나무, 아래에 잔뜩 존재감을 과시하는 수많은 이끼,

이름 모를 꽃과 풀들. 그 사이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 그리고 그 숲과 갈대들 사이를 튕기며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

갑자기 너무 많은 그대로의 아름다운 것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정도.

나의 유일한 삶의 소원대로 내가 숲 하나를 만들어 그곳을 걷고 있는 듯 

숲 속을 우리만 걷고 있는 느낌 또한 특별한다.

한국에서 마음이 어수선하고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혼자 산을 만나러 가던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안정감과 평화로움이다.


그렇게 10분도 걷지 않았는데 다시 후드득.

응? 비가 다시 오네? 곧 그치겠지. 돈 워리 토미!

후두 두두두 두둑

오오오 좀 많이 오는데? 곧 그치지 않겠어? 아까도 5분도 안 내리더라고. 걱정 마시게 토미.

푸두두두두파두두두두다다다다다다닥

앞에 보이지 않는 폭우에 이미 가방, 옷, 속옷, 양말, 신발 모두 홀딱 젖어버린 상태가 입산 20분 정도부터

계속된다.

그래도 그치겠지. 하던 비는 점점 거세지고, 너무도 심플한 이정표 덕분에 한참 길을 찾기도 하다가

오르막 내리막이 수 없이 반복하는 코스를 묵묵히 걷을 뿐이다.

숲 속 호숫가에 걸터앉아 도시락을 까먹고 한참을 멍 때리며 있다가 오겠다는 한량이의 계획은 모두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나와 같이 비가 오는 것은 좋아하지만 비에 젖는 것을 질색하는 토미는 이미 이를 악물고 걷기 시작했다.

비라면 홀딱 맞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도 축축하고 신나게 걷다가 

식탐만큼 무거운 도시락의 무게와 젖은 가을 옷의 무게로 몸이 무겁고 길이 보이지 않아 당황하기 시작했다.

산과 들과 마당을 뛰어놀던 나도 자연스러워야 할 자연에서 원초적인 두려움을 느끼는데

서울에서 떠나본 적도 없고, 아파트 등의 신식 건물에서만 살던 토미가 얼마나 당혹스러워하는지 느껴진다.

초행길이기에 처음 잡아 본 코스를 조금 걸어보다가 계획하지 않는 다른 길들로 빠져서 오래 걸어보자고 

신나게 얘기하던 우리였는데

구멍이 뚫린 듯 태풍이 지나가던 한국의 장마처럼, 수시로 찾아오는 달랏의 폭우 같은 비가 2~3시간 이어져

빨리 할티야 인포를 향했다.


너무 홀딱 젖어 들어가기조차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화장실도 쓰고 좀 앉아 쉬어야겠기에

들어간 관리사무소에서 이래저래 숨을 돌리고 화장실 앞 의자에서 도시락을 먹으려는데 이건 아니다 싶다.

숲 속에서 호수를 바라보며 먹고 싶었단 말이다. 

이 무겁고 맛난 짐을 가져온 이유는 그것이란 말이다아!

마침 비가 그치고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더니 아주 부슬부슬 맞고 먹을 만한 비로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냥 있고 싶어 하는 토미를 재촉하여 또 퍼붓기 전에 길도 알 수 없지만 본능이 이끄는 대로 찾아 걷기 시작하니

잔잔하고 넓은 호수와 뒤를 둘러싼 숲, 그리고 그 바로 곁에 모래밭 위 나무 의자가 꼭 우리를 위해 준비된 자리처럼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하게 자리하고 있다.

팬티까지 홀랑 젖어버려 몸의 기분은 정말 뭐라 말할 수 없지만

도시락을 꺼내 그 풍경 속에서 먹는 마음의 기분이란.....!

비에 범벅된 커리를 비벼 먹어도 그냥 무조건 맛있는 맛이다.

세상 최고의 식당에서 꿈같은 식사를 마치고 나니 그제서야 거짓말처럼 해가 쨍.

정말 다이나믹한 자연의 손아귀에서 제대로 맡겨진 아침부터의 몇 시간이다.


예상보다 눅시오에서의 시간이 빨리 끝나게 되어 헬싱키로 빨리 돌아가게 되었으니 바로 집에 가기는 아쉽고

몸은 축축해도 어딘가 더 다니고 싶어 이왕 거금 들여 구매한 데이 티켓의 뽕을 뽑고자 수오멘린나로 출발한다.

바람 하나 끝내주는 헬싱키답게 조금 지나니 집에서 운동화를 빨면 몇 날 며칠이 되어도 바싹 마르지 않아

쿰쿰이가 되어 버리는데 그 물에 완전 담근 모든 복장을 바싹하게 자연건조시켜준다.

그렇게 수오멘린나까지 온통 즐기고서야 두 손 가득 맥주를 들고 뜨끈하고 시원하게 몸을 씻어 낸 후 

우리만의 완벽한 뒤풀이를 즐긴다.


내일 또 초조하고, 불안하고, 불편하고, 짜증이 날지언정

오늘은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하다.

자연의 손아귀에 온몸과 마음을 내맡겨버린 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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