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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Nov 15. 2020

(Macedonia Ohrid)  
지진

마케도니아 일지







2019.09.21


주말은 새벽 산책의 날.

한국보다 일교차가 큰 계절을 지내고 있는 오흐리드의 아침은 상쾌하고 서늘하다.

그리고 이 관광도시의  새벽은 고요해서 이방인이 조용히, 하지만 신나게 뚜벅이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걸음보다 더 빨리 달려 나가는 태양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어스름한 새벽 까네오의 숲길을 걷고

내려올 때 해를 마주 보며 집으로 돌아온다.


일찍 문을 여는 마트 덕분에 아침 식사 수박을 구입해 쩍 잘라서 반 통씩 푹푹 퍼먹는다.

정말 오흐리드 수박을 먹고 있으면 어린 시절  여름밤.

옥상에 돗자리를 펴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별을 보며 수박을 먹던 행복한 기억이 떠오른다.

한국에서는 몇 조각 먹지 못하던 토미가 이제 육식을 한두 달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생활을 하고 있어서인지

작은 수박은 혼자서도 먹고, 큰 수박 반 통은 나처럼 뚝딱이다.

떠나고 인생 첫 홀쭉이가 되었다고 꽤 신난 토미. 

허리둘레가 10cm가 줄고 복근이 보일 정도니...  

식물의 힘은 참 대단하다는 걸 토미를 보며 느낀다.


허겁지겁 수박을 퍼먹고, 칼칼한 음식이 당기는데 된장과 간장가루는 아끼고 싶어 

급조 야매 레시피로 처음 끓이게 된 호박, 감자, 토마토 얼큰탕이 오늘의 식사.

샐러드와 밥, 반찬을 세팅하고 샐러드를 먹으려는 순간 웅~~~

머리가 울린다.

또 잠시 어지러움이 찾아왔구나. 싶어 다시 젓가락을 드는데 심하게 웅~~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토미가 어지럽다 한다.

그러더니 다시 웅~~~ 하는데 이건 둘의 어지러움이 아니고 집이 흔들리는 것이다.

식탁 위의 반찬통, 노트, 책 모든 게 흔들거린다.

잠시 멍. 시간이 멈춘 듯 가만히 판단해 보니 이게 설마 지진??

맞는 것 같다. 처음 겪지만 이건 지진이다.


여기는 7층 높이의 오래된 아파트.

초등학교 시절에 몇 번의 대피 훈련을 한 기억은 있지만 그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 

지진 안전지대에 살던 나로서는

가장 튼튼한 탁자 밑에 일단 숨는 거였나??

지금 짐을 챙겨서 배낭만 메고 내려가야 되나?

지금 모든 게 무너지면 내가 토미를 감싸면 토미는 살 수 있을까?

옷을 갈아입어야 되나?

두서없고, 정리되지 않은 잡생각들만 오갈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일단 토미는 탁자로 들어가자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멍 때리며 앉아있다.

그렇게 지속되던 흔들림이 멈추고 이제 끝났나 싶은데 그런 것이 몇 번 반복이 되고 나서야 멈춘 듯하다.

심한 어지러움을 자주 겪던 것보다 더 지속적인 이 어지러움은 멈춘 후에도 속이 메슥거리고, 

금방이라도 토할 듯이 몸을 중심부터 뒤흔든 것 같다.


내가 정보를 얻을 곳은 집주인뿐.

바로 메시지를 넣으니 알바니아 두레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진이 났는데 오흐리드까지 

진동이 왔다고 한다.

기사를 검색해 보니 알바니아에 5.8도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수도 티라나에까지도 피해가 있다고.

세상에......

와락 눈물이 난다.

이렇게 멀리서도 집이 흔들리고 속이 뒤집어지는데 지금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실시간으로 

고통을 받고 있단 말인가.

처음 겪은 지진의 힘이 놀랍고, 없던 근본적인 두려움까지 생긴다.

우리는  오흐리드에서 10월 말까지만 머물고 바로 알바니아 티라나에서 한 달 머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와 알바니아 티라나 중 한참을 고민하다가 알바니아로 결정한 우리다.

요즘 내내 숙소와 차편을 알아보고 있던 차였다.

대기 질과 물가, 테러 등만 조사하고 행선지를 정했지, 지진은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이다.

이제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게 되었지만 사는 내내 지진과 자연재해에서 비교적 안전한 

경기, 서울에서만 살았던 덕이다.

한국 기사에는 인터넷 기사만 몇 줄 뜬 것 같은데 구글로 보니 실시간으로 피해 정보들이 올라온다.

내 머리는 계속 울리고, 속은 계속 토하기 직전이다.

여진이 있을까 싶어 지금 뭘 해야 되나 갈피를 못 잡고, 멍청하게 순간을 버리고 있다 보니 여진은 없다.

멈춘 것 같다.


이제서야 알아보니 지형의 특징상 발칸은 지진이 잦은 곳이었다.

알바니아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모두.

알았어도 왔을까 싶지만 알았어도 발칸 어딘가에서 있었을 우리.

아직 한 달이 더 남은 마케도니아 생활과 앞으로의 행선지에 대한  두려움이 초조함만 느끼게 하지만

차분히 생각해 봐야겠다.

지금으로서는 여진이 더 없었으면 싶고, 지진의 규모보다 피해가 덜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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