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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Oct 19. 2019

(아직은) 초록별 일지

(Estonia-Tallinn) 탈린 월세집




폴란드와 같다.

백야로 인해 새벽부터 강제 기상이다.

서울에서 휴일에도 새벽 6시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탈린 우리 집(바른 말로는 남의 집 월세집)에서의 평화로운 일과를 시작한다.

전날 마트에서 사다 놓은 바나나를 먹고, 한 달 동안 우리가 쓰기 좋도록 세팅을 해보고,

손빨래를 하고, 세탁기를 돌려보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세탁기 관리만큼은 민감하게 했었기에 나와서는 세탁기를 절대 안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그 결심은 20여 일 만에 무너졌다.

통청소를 깨끗하게 하고선 외출복과 양말은 남의 집 기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참으로 빨리 무너지는 단단한 결심이다.

우선 세탁기 설명서를 눈이 빠져라 뇌가 찢어질라 읽고 통청소를 돌리는데

잘 돌아가던 세탁기가 갑자기 멈춘다.

왜 그러니 베코야?

내가 뭘 잘못 건드린 거니?

기다려봐도 도무지 문도 열리지 않고, 어떤 것을 눌러도 작동이 되지 않는다.

1시간을 끙끙대다가 호스트 트린에게 문자를 넣으니

자기는 쓰지 않아서 모른단다.

이런...

이거 이러다가 수리 기사를 부르고, 변상하고, 한 달 굶고......

온갖 좋지 않은 걱정들이 피어오르던 때에

혹시나 싶어 세탁기 위의 박스를 열어보니 거기에 있는 전원 차단기가 내려갔던 것,

그것을 올리니 바로 불이 들어오고 신나게 도는 것이 아닌가!

통청소를 하고 외출복과 양말을 맡긴다.

살면서 매일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세탁기라고 생각하고, 

한국 우리 집에서의 세탁기를 우젠이라고 부르며 매일 고맙다 고맙다 했었던 나.

다른 기계가 모두 없어진대도 세탁기는 건재했으면 한다.

고맙다 베코돌이.

집안일을 하는 틈틈이 창밖을 보는 것이 즐거움이다.

아랫집 아주머니가 널어 놓은 포근한 빨래, 몇 그루 되지 않는데 숲 같은 풍성함이 느껴지는 나무, 

낮은 곳에 핀 작은 꽃, 나무로 된 오래된 창고, 창고 위에서 자라는 쑥쑥 풀들, 

참새만큼 흔한 갈매기, 까마귀. 그리고 어제저녁에 처음 만난 이 동네 고양이 냥돌이.

한껏 눈에 담고,  

나도 빨래를 넌다.

토미가 고른 비건 초코 두유와 코코넛 초코와 시리얼로 미치도록 달콤한 점심 식사를 하고

금방 배가 꺼져서 어제 간신히 찾아낸 현미로 밥을 짓고, 호박과 버섯을 썰고 

비장의 카드 된장과 한살림 청양 고춧가루를 팍팍 넣어 우르르 된장국을 끓여내어 

으허~

하며 먹어대니 

짧게 여행했을 때와는 다르게 정말 이사를 왔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폴란드에서도 경험했지만 현미가 한국의 현미가 아니다.

밥이 정말 無 맛에 그냥 동남아의 그 쌀이다.

밥맛이 너무 충격적이라 빠른 시일 내에 연구를 해봐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오늘은 동네 탐방도 할 겸 T1 몰이라는 곳에 가서 그놈 욕실화를 찾을 요량으로 나섰다.

전날 트램 타고 집에 오는 길에 '미니소' 간판을 보았기 때문에 (미니소에는 분명 욕실화가 있을 것이다!)

그 미니소가 입점된 곳이 티원 몰이었다,

집을 나서자 마자 괜히 나왔나 싶은 타는 햇빛이다.

북유럽에 가까운 발트의 탈린이라 폴란드 보다 훨씬 시원하겠구나 싶었는데 웬걸.

냐짱에서 죽음의 태양을 경험했던 때가 그대로 재연되는 쨍쨍함이다.

냐짱은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지만 여기는 해가 지지 않아서 온종일 쨍쨍하고, 

뜨겁고, 덥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다음 달에 이사 가는 핀란드도 이런 건 아닌지 

햇빛 취약 자는 벌써부터 걱정이다.

최대한 그늘을 찾아 박쥐처럼 이동하면서 보이는 풍경들은 무척이나 평화롭고 아름답다.

정말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이구나. 생각되는 모습이다.

물론 대로변을 지나야 할 때는 똑같이 괴롭지만.

적당히 타죽기 직전에 도착한 티원 몰.

미니소에서는 쪼리와 거인과 어린이 사이즈의 슬리퍼뿐이어서 이거라도 어디냐! 싶었는데 

같은 건물을 셀버 라는 마트를 뒤져보니.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무려 5유로 가까이하는 미친 가격이지만 동양의 왕발이들의 발에 맞는 욕실 화가 1종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 욕실화는 깨끗하게 관리해서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꼭 함께 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욕실화를 신고 볼일을 보고, 샤워하고, 좁은 화장실에 발을 디디니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내일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암막 커튼도 없는 우리 집에서 

잘 때만이라도 밤으로 만들 무언가를 찾아야겠다.

해가 지지 않는 앞으로의 나날이 두렵지만

이런 신비함을 당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행복하다.

그래도 쌀은 맛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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