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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지연 Oct 19. 2019

(아직은) 초록별 일지

(Estonia-Tallinn) 매일매일 식량 공수




생각보다 힘든 백야이다.

창문의 빛을 가리는 응급 처치를 해도 남의 집이라 어설프게 간이 조치를 할 수밖에 없으니

안 하는 것보다는 백만 배 낫지만 빛 예민자에게는 그것도 밝다.

게다가 오전 5시부터는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여 창에 서 있으면 피부가 아프고 시커멓게 익는다.

역시 겪어보지 않는 이상 다큐와 지도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오후 6시 이상이 되어야 조금 살만해지는데 

아직은 매일 마트와 시장을 다니며 먹거리 공수와 탐방을 해야 하므로

가장 큰 재래시장이라는 Balti jaama Trug에 가기로 한다.

가는 길에는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라 매일 들르는  Solaris Bio 매장에 먼저 들른다.


첫날 봐 둔 후로 매일 들러서 과일과 채소를 사는데 

규모도 제법 크고 먹거리부터 화장품까지 없는 것이 없다.

그리고 어찌나 친절하신지 얼굴만 마주 봐도 씽끗 떼레!

뭘 여쭤봐도 누가 봐도 영어 못할 것 같은 누더기 이방인에게 유창한 영어로 천천히 설명해 주시고, 

나가는 순간에도 방긋 미소를 잊지 않는, 

모든 직원들이 그런 매장이다.

오늘은 사진 찍어도 되는지 여쭤보니 그것도 씽끗! 그럼!

물론 이 매장의 물가도 저렴하지 않다.

한국의 유기농 매장들과 비슷한 가격이다.

그러나 아주 큰 차이점이 일단 하나가 있는데 그건 과일, 채소 등 신선 식물들이 모두 

비닐, 플라스틱 포장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 한국의 한살림이라든지, 초록마을, 올가, 생협 등 유기농 매장을 이용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불편함이 바로 

왜 식품은 유기농인데 포장은 친환경이 아니냐는 점일 것이라 생각한다.

항상 불편했다.

내가 먹는 게 유기농인데 포장물은 환경파괴 앞잡이구나...

그래서 박스로 된 상품들을 벌크로 구입하여 먹곤 했지만

그것 또한 아이스박스,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빨리 한 뙤기의 땅이라도 구해서 다 가꿔서 먹어야겠다.  생각하며 죄책감과 자괴감에 힘든 나날이었는데

여기서 그 소원을 일단 풀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달랏의 유기농 매장에서도 이런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죄책감을 조금 덜고 장을 볼 수 있음에 행복했다.

종류별로 담지 않아도 되고,  하나만 사도 된다.

종이봉투에 버섯도 담고, 호박, 오이도 담고, 사과도 담고 바나나도 담는다.

매일 내가 만든 에코백을 들고 다니니 거기에도 담아 간다.

집에서 식초물에 담가 깨끗하게 씻으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다음갈 길을 생각해서 하루치 잎채소와 열매채소, 버섯, 과일을 조금만 사서 시장을 찾아보자.


너무 뜨겁다.

돌아갈까 싶지만 시장 구경을 빼놓을 순 없고, 체리의 진통 효과를 느껴보고 싶어서 

체리를 꼭 구해오고 싶다.

유기농 매장에는 체리가 없다.

한국에서도 농약 친 과일, 채소를 산 적이 없는데 나오니 아주 흐트러진다.

가는 길은 무려 아주 유명한 올드타운을 거쳐 갈 수 있다.

따로 작정하고 둘러보지 않아도 시장 가는 길목에서 중세를 만난다.

조금은 오래 머물러 보기를 하지 않으면 겪어보지 못할 사치다.

시장은 사전에 구글에서 본 대로 내가 좋아하는 야외의 북적북적한 시장은 아니지만

규모가 큰, 그늘이 있는, 거의 실내라고 할 수 있는 시장이다.

농약과 제초제를 많이 사용했을까? 껄끄러운 기분은 어쩔 수 없지만

체리는 볼 줄도 모르지만,

열심히 모든 가게를 둘러보고 나름 가격과 상태를 보고 구입해 본다.

이 시장 건물에는 뭐가 많다.

이 시장이 올드타운이나 시내보다 나름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내 기준에는 여전히 비싼 

푸드코트 개념의 식당들, 솔라리스보다 큰 유기농 매장, 

그리고 마트 중 내가 사는 품목이 가장 저렴한 셀버도 있다.

신이 나서 아까 장본 것에다 과일에다 또 유기농 통밀빵 한 덩어리에, 안주에 맥주까지.

눈이 돌아가서 이것저것 사고 만다.

가는 길은 돈 아깝지만 트램이나 버스를 타자 토미.


탈린은 희한하게도 걷는 것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 비슷하다.

내가 사는 곳의 교통이 그래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래도 걸어서 1시간 걸리고 짐이 많아졌으니 차비 지출을 하자 토미.

차 타는 곳의 위치가 정류장 표시도 없고, 애매하여 그 짐을 들고 여기저기 헤매다가 

정류장 표시가 없던 그곳에서 20분을 기다리니 집 가는 버스가 와서 승차했는데

이런.... 이런 실수를!

땡볕에 짐을 들고 정신을 놓았는지 버스비를 미리 확인해 보지도 않고 올라탔더니

총무, 돈 담당 토미 왈

돈이 모자라.

엥?

돈이 전혀 없어??

100유로...

어뜩해!

동전은?

3.99

그럼 0.1, 10센트 부족??

아...

카드 찍어볼까?

앞에서 우왕좌왕...

찍었는데 안된다. 안 찍힌다.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를 보고 기사님 왈

오케이 프리 프리!

아 그럴 수 없는데 그렇다고 4유로인데 버스 타고 100유로 내는 것도 업무방해일 것 같고

종점이라니까 내려서 나만 내려 잽싸게 어디 상점에서 물건 사고 잔돈을 바꿔서 드려야 하나 

그러고 있는데

토미가 3.99를 기사님께 건넨다.

기사님이 프리프리! 라며 거절하시다가 웃으며 받으신다.

아...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오늘도 우린 천사를 만난 게 분명하지만 마음속에 짐으로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실수 안 해.

난 그런 건 조심하고, 철저하니까 걱정 마.

이런 생각도 모두 놓고, 더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한다.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잘 잡고 어느 상황이든 깨어있어야 한다.


매일 만나는, 이방인에게도 따뜻함을 주는 탈린의 사람들.

비싼 물가로 매일 뭐 하나 사는데 손이 떨리지만

덕분에 잘, 웃으며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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