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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Sep 25. 2020

클래식의 풍요로움, 자연과 하나가 되다

잘츠부르크와 프롬스, 벨러이와 쇤부른 : 내가 경험한 유럽 음악 축제

1993년 9월 25일 천재적인 뉴에이지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야니(Yanni)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했다. 현대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 역사적인 라이브 연주는 전 세계 65개국 5억 명 이상이 시청했고, <Live at the Acropolis>라고 명명된 CD와 DVD는 800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2018년에 25주년 기념 투어로 한국을 찾은 야니의 공연을 나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관람하며 당시의 감흥을 조금이나마 함께 할 수 있었다.


뉴에이지 음악의 파격과 변주를 감안하더라도, 대형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음악공연을 탁 트인 야외에서 진행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고요한 집중과 정교한 음향이 요구되는 클래식 연주에서 변화무쌍한 날씨와 자연 소음, 산만한 주위 환경 등 통제하기 힘든 악조건들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관객들은 야외 경관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는 호사를 누릴 수 있고, 공연 영상에는 연주 모습뿐만 아니라 현장의 다양한 풍경을 담을 수 있다.    


정통 클래식 음악공연 역시 익숙한 실내 콘서트홀을 벗어나 야외에서 자연을 벗 삼아 연주하는 도전을 종종 시도하고 있다. 나는 유럽에 살면서 고색창연한 궁전을 배경으로 펼쳐진 멋진 클래식 공연을 몇 차례 직접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클래식의 우아하고 풍요로운 선율이 나를 둘러싼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비롭고 소중한 추억이었다.


유럽에서는 매년 아름다운 자연과 고성을 배경으로 크고 작은 클래식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특히 한여름에 열리는 환상적인 음악의 향연을 듣고 있노라면 무더위 속 찰나의 상큼한 바람처럼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곤 했다. 유럽의 야외 클래식 공연이 나에게 안겨준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을 이제 당신에게 선사해 드리고 싶다.


100년 전통을 지닌 한여름 최고의 클래식 공연


해마다 7월부터 9월 중순까지 유럽은 클래식 연주를 비롯해 오페라와 뮤지컬이 함께 하는 여름 음악 페스티벌을 진행한다. 보통 4~5월에 공연 프로그램을 확정하여 인터넷에 공개하니, 하루라도 빨리 예매를 하면 좋은 자리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한여름 밤에 아름다운 꿈과 추억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클래식 공연으로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런던 프롬스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1920년, 오스트리아의 시인이자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슈탈과 배우이자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 그리고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주축이 되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평화를 위한 예술가들의 행동"이라는 모토로 출발한 이 행사는 한동안 오페라 공연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1956년 역시 잘츠부르크 출신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를 맡으면서 명실상부 유럽 최고의 클래식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2019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중 펠젠라이트슐레에서 펼쳐진 클래식 공연


특히 2020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게 매우 상징적인 해다. 이 행사가 시작된 지 100년이 되었고, 베토벤이 탄생한 지 250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은 7월 18일부터 8월 31일까지 펼쳐질 클래식, 오페라, 연극 등 200여 개의 화려한 공연 레퍼토리를 준비하고 대대적인 홍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코로나19의 확산 때문에 100주년을 맞이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일정을 단축하고 초라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모차르트와 카라얀이 만든 세계 최고의 클래식 공연, 살아있는 클래식의 역사이자 톱클래스 음악가에게만 허락된 꿈의 무대, 매년 전 세계 70여 개국 25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한여름 밤의 클래식 축제 등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게 보내는 찬사는 끝이 없을 정도다.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세계적인 연주자, 성악가, 배우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실내악, 관현악, 성악, 오페라, 연극이 음악도시 잘츠부르크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펼쳐진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또 다른 특징은 음악과 도시 관광의 만남에서 찾을 수 있다. 공연이 열리는 40여 일 동안 잘츠부르크 시내뿐만 아니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잘츠카머구트 지역은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잘 만든 문화콘텐츠가 도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좋은 사례다. 2016년 결산자료를 보면, 총예산 6050만 유로(약 830억 원) 중 50% 이상을 티켓 판매 수익으로 채웠고, 나머지는 정부 지원과 각종 후원금으로 충당했다. 페스티벌이 지역 경제에 유발한 효과는 3억 유로(약 41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단정한 드레스코드와 진지한 작품 해석을 추구한다면,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주관하는 섬머 페스티벌 프롬스(The Proms)는 누구나 자유롭고 편안하게 클래식을 즐기자는 취지로 진행된다. 1895년에 시작해서 올해 125주년을 맞이한 프롬스는 산책(promenade)과 콘서트(concerts)를 합성하여 만든 조어다.  


매년 프롬스가 열리는 7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런던은 클래식 음악의 향기로 가득 찬다. 메인 공연이 펼쳐지는 로열 앨버트 홀을 비롯해서 실내악 등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카도간 홀 그리고 '프롬스 인 더 파크'의 주무대인 하이드파크에서 90여 회의 화려한 공연이 진행된다. 프롬스는 클래식 초보자나 청소년을 위한 입문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준비했고, 연주자와의 대화를 비롯해 일반 시민들과 클래식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문화행사도 마련했다.          


한여름 밤 야외에 펼쳐진 BBC 프롬스 음악 공연에 열광하는 런던 시민들


클래식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BBC 프롬스 역시 올해는 코로나19의 여파를 피해 가지 못했다. 2주는 무관중 생중계, 2주는 최소 인원 관람으로 간신히 행사의 명맥을 유지했다. 여기에 프롬스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지막 날 로열 앨버트 홀 공연에서 제국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영국 국가 가사를 화면에 띄울지 말지를 놓고 BBC와 보수 정치권이 충돌하는 등 이래저래 페스티벌의 명성에 흠집만 남겼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BBC 프롬스는 100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유럽 최고의 한여름 클래식 공연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음악 애호가뿐만 아니라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과 일반 시민들까지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본연의 색깔을 유지하면서도 끊임없는 변신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클래식 전용 실내 콘서트홀에서 벗어나 도시 전체를 클래식의 향기로 가득 채운 두 페스티벌이 있기에 유럽의 여름은 여전히 설렌다.


코로나19의 비극과 함께 한 2020 쇤부른 음악회


유럽에는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연주자들이 참여하여 두 달 이상 성대하게 펼쳐지는 페스티벌 말고도 작고 아기자기한 하루나 이틀짜리 야외공연이 수시로 열린다. 나는 브뤼셀에 거주하던 2012년 여름 벨기에 중서부의 작은 도시이자 바로크 풍의 정원과 성곽이 있는 벨러이를 방문했다. 8월 25일 벨러이 성에서 개최된 멋진 클래식 공연(Musicales de Beloeil 2012)을 보기 위해서였다.


화창한 여름 날씨가 행사를 환영하는 가운데 드넓은 잔디밭과 아름드리 무성한 고목을 배경으로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었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삼삼오오 간이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자연의 풀내음과 벌레소리 그리고 청아한 피아노 선율을 함께 느끼며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벨러이 성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작은 음악회들은 음향을 조절하고 음파 간섭을 최소화하여 관객들을 맞이했다.


오후 공연이 마무리되고 저녁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관객들은 집에서 준비해온 음식 바구니를 들고 잔디밭에 앉아서 도란도란 식사를 했다. 어둑어둑해지는 석양의 노을빛을 바라보며 현악 3중주 공연이 이어졌고, 20인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연주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나중에 기사를 보니, 이 날 약 8000명의 관객이 참석했고, 30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원활한 진행을 도왔다고 한다.


벨러이 음악 페스티벌 중 화창한 오후에 진행된 피아노 독주 공연


석양의 노을빛을 받으며 초저녁에 진행된 현악 3중주 공연


현재 비엔나에 살고 있는 나는 기회만 있으면 오페라하우스나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리는 음악공연을 보러 가곤 했다. 비엔나는 매일 시내 곳곳에서 음악공연이 열리고 그 많은 공연이 대부분 매진될 정도로 음악을 뜨겁게 사랑하는 도시다. 코로나19로 인해 힘든 상황이지만, 한 칸씩 떨어져서 좌석배치를 하고 대신 공연 횟수를 늘리는 등 연주자와 관객이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나는 지난해 9월 18일 쇤부른 궁전에서 개최된 여름 음악회를 관람했다. 보통 6월에 개최되는데, 2020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9월로 늦춰졌다. 말이 여름 음악회지, 영상 15도의 쌀쌀한 초가을 날씨에 펼쳐진 가을 음악회였다. 예년 같으면 10만 명 이상의 인파로 북적이며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되던 음악회가 작년에는 정관계 VIP와 인터넷 추첨에서 당첨된 시민 등 1250명만이 초대되어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2019년과 2020년 현장 사진을 비교하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초래했는지 실감하게 된다.


쇤부른 여름음악회 2019 모습. 쇤부른 궁전 중앙에 무대를 설치했는데 그 너머 언덕에도 인파가 빼곡하다.

  

쇤부른 여름음악회 2020 모습. 궁전 바로 앞에 무대를 설치했고 소규모 관객만이 조용히 앉아있다.


이번 공연의 정식 명칭은 2020 빈 필하모닉 여름음악회다. 오스트리아가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빈필이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 아래 사랑을 주제로 바그너와 멘델스존의 감미로운 작품을 연주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테너 성악가로 평가받는 요나스 카우프만이 <네순 도르마>를 열창하는 순간, 나는 숨을 죽이며 그의 목소리를 감상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베르사유 궁전과 비견될 만한 궁전을 갖고자 지은 쇤부른 궁전은 여름 별장답게 시원한 풍광과 분수, 광대한 잔디언덕과 동물원을 갖추고 있다.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쇤부른 궁전에서 빈필의 연주와 카우프만의 미성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평생의 행운이었다. 나는 그날 밤 TV에서 쇤부른 공연 녹화방송을 시청하며 다시 한번 현장의 감동을 음미했다.


야외 클래식 공연이 선사하는 놀라운 즐거움

 

한국은 1년에 1만 5000여 개의 축제와 행사를 개최한다. 이 정도면 시민 모두가 신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축제가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또는 자연환경을 활용한 체험관광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화천 산천어 축제, 함평 나비 축제, 보령 머드 축제, 남원 춘향제 등이 대표적이다.


다행스럽게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역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페스티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평창 대관령음악제와 통영 국제음악제가 대표적이다. 국내의 많은 클래식 애호가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프로그램으로 매년 훌륭한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두 음악제 모두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유하고도 실내 콘서트홀 공연으로만 진행한다는 사실이다.


서울의 덕수궁과 경회루, 수원 화성, 경남 진주성 등 우리는 유럽의 화려한 궁전과 고성 못지않게 유서 깊은 장소를 보유하고 있다. 계절의 정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봄이나 가을에 가족과 연인이 즐겁게 산책하며 음악을 감상하고 적당히 요기도 할 수 있는 음악축제를 기획한다면 도시 경제에 큰 활력이 되고 문화적인 품격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앞서 소개한 유럽의 야외 음악공연이 그들의 고전음악인 관현악을 중심으로 연주되었다면, 우리는 서양의 클래식과 한국의 클래식인 국악의 컬래버레이션을 시도해도 좋을 것이다. 피아노와 대금이 선율을 맞추고 현악 4중주와 사물놀이가 함께 어우러지는 동서양의 클래식 합주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기대되지 않는가. 세계적인 성악가와 국내 최고의 소리꾼이 화음을 맞춰 듀엣송을 부르는 장면이 보고 싶지 않은가.


탁 트인 야외 잔디밭에서, 아름드리 고목이 있는 숲 속에서, 화려한 고궁에서 다양한 클래식 공연들이 줄지어 개최되고, 과연 올해는 무엇을 보러 갈지 행복한 고민을 하게 되는 그런 날이 우리에게도 오게 되기를 상상해본다. 가족과 함께, 친구나 연인과 함께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연주를 들으며 하루를 추억할 수 있는 그런 축제가 언제든 우리 곁에 있는 그런 도시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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