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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Jul 04. 2020

클림트와 BTS, 세기말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다(하)

100년의 간격을 두고 세계를 홀린 오스트리아와 한국의 천재 아티스트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비엔나를 중심으로 음악, 미술, 조형, 건축, 문학 등 다양한 문화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창작자들이 등장했고 협업을 통해 뛰어난 작품을 선보였다. 이들이 만든 걸작은 당시뿐만 아니라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대를 초월하여 감동을 주고 있다.  


그로부터 백여 년이 흐른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까지 한국을 기반으로 대중문화의 화려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드라마와 게임, K팝과 웹툰 등 다양한 장르에서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며 전 세계 시민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평소 대중문화와 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이 두 현상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배경과 특성을 발견했다. 한류의 의미와 BTS를 비롯한 대표 아티스트들의 매력을 먼저 살펴보고 난 후, 세기말 비엔나와 서울에서 불꽃처럼 타오른 문화예술의 평행이론을 만나기로 하자.

 

한류의 중심 K팝, BTS로 완성되다


세계 인구의 0.7%에 불과한 한국이 만들어 낸 ‘0.7%의 한류 기적’은 1997년 중국 CCTV에서 TV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가 방송되면서 시작되었다. 돌이켜보면 1997년은 IMF 경제위기를 맞아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충격적인 국가 부도의 시기였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최초의 진보정권이 들어선 해이기도 했다.


정치 경제적 격변과 함께 사회 문화적으로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세대가 이동하면서 전례 없는 기대와 희망, 두려움과 낯섦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이처럼 혼돈스러운 세기말을 배경으로, 불과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쇄국’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자 비영어권 국가인 한국에서 전 세계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매력적인 문화콘텐츠가 탄생한 것이다.  


비엔나를 빛낸 문화예술 분야가 음악과 미술, 건축과 공예, 문학과 심리학 등이었다면, 한류를 수놓은 대표적인 대중문화 장르로는 K팝과 게임, 드라마와 웹툰, 애니메이션과 공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장르의 대표작품과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컬래버레이션과 융복합 작업을 통해 상상을 뛰어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한류 장르라 할 수 있는 K팝은 현재 싸이와 BTS의 노래를 통해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한국의 대중가요는 1992년 랩과 힙합으로 무장한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이후 시장 규모가 확대되고 장르가 다양해지는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2001년 16세 소녀 보아가 일본 가요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면서 K팝의 역사적인 서막이 시작되었다.


2019년 7월 뉴욕 맨해튼에서 개최된 K콘 현장의 열기 :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이틀 동안 5만 명 이상이 운집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1년 5월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광장에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K팝 공연 연장을 요구하는 떼창과 군무를 했다. K팝의 글로벌 인기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플래시몹이다. 마침내 4년 후인 2015년 12월 애플뮤직과 아이튠즈 스토어는 아시아 음악 중 최초로 ‘KᐨPOP’을 장르 분류에 신설했다. K팝은 J로 시작하는 재즈와 L로 시작하는 라틴음악 사이에 들어갔다.


K팝의 글로벌화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뮤지션은 누가 뭐래도 싸이다. 그가 발표한 <강남스타일>은 유튜브와 SNS를 타고 전 세계를 강타했다. 간결하고 친숙한 멜로디와 인간의 본능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B급 안무로 무장한 싸이의 매력은 특히 라이브 공연에서 맘껏 발산되곤 한다.


매년 서울에서 개최되는 싸이 콘서트는 전회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끈다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빅뱅도 한류를 드높인 대표 뮤지션들이다. 동방신기와 소녀시대는 치밀한 트레이닝을 통해 외모와 춤, 댄스 등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아이돌 댄스 그룹이다. 이들의 춤은 정교하고 일사불란하면서도 각자의 미묘한 감성 디테일이 녹아 있다. 빅뱅은 자체 프로듀싱 능력을 갖춘 개성 강한 보이그룹이다. 스타일리시한 패션과 자유분방한 콘셉트로 폭발적인 팬덤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BTS가 등장했다. EDM과 안무 위주의 아이돌 그룹들이 대세를 이루던 2013년, 힙합을 강조하며 등장한 BTS는 수년 동안 비주류의 오랜 설움을 딛고 일어서서 2017년부터 K팝의 최강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파워풀한 안무와 진심이 담긴 가사, 아미로 상징되는 강력한 팬덤과 일상의 모습을 담은 브이로그 등이 BTS의 성공요인으로 꼽히지만, 나는 멤버 7명이 지닌 아티스트로서의 천재성과 성실함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각자 다양한 컬래버레이션 실험을 통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추구하면서도, 유튜브나 SNS를 활용한 팬들과의 소통에 항상 적극적인 BTS에게는 K팝의 '어나더 클래스'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다.       

 

한류의 힘, 위대한 아티스트와 창의적인 작품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는 한국 대중문화의 힘, 한류는 K팝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중문화 장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먼저 TV 드라마. 한류의 출발을 알린 <사랑이 뭐길래>의 뒤를 이어, 주인공 장금이가 궁궐에 들어가 최초의 어의녀가 되기까지를 탁월한 영상미와 감동적 휴머니즘으로 묘사하면서 사극의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인 <대장금>,  일본과 중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겨울연가>와 <별에서 온 그대>가 손꼽힌다. <겨울연가>와 <별그대>는 종영 후에도 주인공의 매력이 일종의 문화적 현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성공적인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서는 배우, 작가, 연출의 3박자가 잘 맞춰져야 한다. 특히 나는 드라마 작가의 능력에 주목한다. <사랑이 뭐길래>의 김수현은 국민 작가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고, 미국에 우디 앨런이 있다면 한국의 김수현은 그에 견줄 만한 대작가다. <대장금>의 김영현은 철저한 사전 고증을 기반으로 완성도 높은 퓨전사극의 진수를 선보였다. <별그대>의 박지은과 <태양의 후예>의 김은숙은 로맨틱 코미디 분야에서 탁월한 작가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경제적 측면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게임. 게임 한류를 개척한 1세대 주역은 <리니지>다. 첨단 인터넷 환경과 PC방 확산에 힘입은 <리니지> 열풍 이후, <크로스파이어>가 중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2세대 게임 한류의 깃발을 높이 세웠다. <던전앤파이터>와 <메이플스토리>도 글로벌 시장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김택진, 박관호, 송재경 등 비전 있는 1세대 게임 개발자들의 역할과 함께, 엔씨소프트와 넥슨의 경쟁적 동지 관계가 핵심 성공요인이다. 


 <리니지>는 단순히 게임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의 벤처기업과 IT 산업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 볼 분야는 웹툰이다. <노블레스>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거대 서사 판타지 웹툰으로 영미권에서 팬덤을 형성할 만큼 높은 인기를 끌고 있다. <마음의 소리>는 일상을 소재로 한 파격적인 엽기 개그를 선보이면서 한국과 중국 독자들에게 선풍적인 호응을 받고 있다. <신과 함께>는 한국의 저승 신화를 재치 있게 묘사해 큰 사랑을 받았고,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현세와 허영만이라는 출판만화 장르의 대가들이 척박한 대지 위에 뿌린 씨앗이 후배 작가들에 의해 마침내 거대한 숲이 되었다. <마음의 소리> 조석, <신과 함께> 주호민, <신의 탑> 시우, <윈드브레이커> 조용석 등 걸출한 작가들은 모바일 폰을 사용하는 전 세계 팬들에게 한국 웹툰의 매력을 알리고 있고, 영화와 드라마의 원작으로 활용되어 그 가치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세기말 비엔나와 서울을 수놓은 화려한 문화예술


20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20년이 넘는 현재까지 다양한 대중문화 장르에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의 문화콘텐츠, 한류는 홍콩 누아르나 재패니메이션에 비견되곤 한다. 그러나 이 둘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정 장르에 국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수명이 길지 못했다. 나는 지난 세기말 비엔나를 중심으로 꽃을 피운 문화예술의 성과 속에서 한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첫째, 문화예술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이 유사하다. 세기말이라는 격변의 시기 속에서 좌절과 희망, 관행과 혁신, 보수와 진보의 가치가 거센 파열음을 내며 충돌하고 있었다. 갈등과 혼돈, 혁명의 세상 한가운데에서 시대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과거의 익숙함과 결별하고 더 치열하게 고민하며 창작활동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적인 예술가와 작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했다. 비엔나에서 재능과 열정을 갖춘 음악가, 미술가, 건축가, 작가 등이 경쟁적으로 나타났다면, 서울에서는 미국의 상업 영화와 드라마, 일본의 대중문화와 홍콩 누아르를 위시한 중화권 문화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관통하고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하이브리드 컬처’ 세례를 받은 대중문화 창작자들이 대거 모습을 드러냈다.


셋째, 비엔나의 문화예술가들과 서울의 대중문화 창작자들은 자신의 전문분야에만 머물기보다 다른 장르의 인재들과 수시로 교류하고 협업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 비엔나의 세기말 작품에는 프로이트 심리학의 영향이 드리워져 있고, 링 슈트라세 인근의 카페에는 예술가들의 담소가 끊이지 않았다. 서울의 크리에이터들은 온라인을 통해 활발히 교류하고 탐색하며 장르 간 융합을 통해 시너지를 창출했다.    


마지막으로 넷째, 비엔나의 문화예술과 한류 창작물의 성과는 당대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사람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20세기 유럽 문화예술계에 세기말 비엔나가 끼친 영향과 여전히 비엔나를 직접 찾아와서 예술작품을 보고 느끼려는 전 세계인들의 모습이 이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물론 한류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아직 섣부를지 모르지만, 이런 평가에는 나의 간절한 희망이 함께 담겨 있기도 하다. 


세기말 비엔나 분리파의 상징 제체시온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그 예술의 자유를" BTS를 비롯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뮤지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보여주는 라이브 공연에는 단지 노래와 춤만이 아니라 패션과 무대미술이 서사적으로 연출되어 엄청난 울림을 안겨준다. 비엔나의 예술가들이 갈망했던 시대정신과 자유에의 외침이 백 년의 간격을 두고 한류 크리에이터들의 '진보적 개방성'과 '문화적 연대'라는 새로운 가치 속에서 다시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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