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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Jun 26. 2020

중요한 건 성적이 아니라 열정이다

유럽 입시제도를 통해 본 대학 전공과 직업 선택의 방식

"대학교수와 잔디관리사 월급이 큰 차이 없어요. 사회적인 대우도 마찬가지고요." 유럽의 대학교육과 직업선택 기준에 대해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들었던 대답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고 따라서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다녀야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성장해온 나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사실 한국에서 줄곧 교육을 받으면서 기회가 된다면 영미권 국가의 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유럽의 교육제도는 큰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나부터도 유럽은 대학 등록금이 무상이거나 매우 싼 반면에 졸업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 거주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면서 그동안 막연하게 느꼈던 한국 교육제도와의 '다름'에 대해 구체적인 차이와 장단점들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내 아이의 대학 입학을 고민할 시기가 되자, 유럽의 대학입시와 전공 선택에 대해 차분히 생각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한 나라의 교육제도는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동안 누적되어 온 그 나라의 역사와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고, 현재의 정치 사회적인 구조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유럽의 교육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교육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교육을 둘러싼 사회 시스템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럽 대학입시 제도의 장단점


유럽은 일반적으로 초등, 중등, 고등과정이 각각 4년씩 진행된다. 최종 12학년을 마친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시험이자 대학 입학자격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명칭은 국가마다 다르다. 독일은 아비투어(Abitur), 프랑스는 바칼로레아(Baccalaureat)로 불리며, 내가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마투라(Matura)라고 한다.


프랑스의 대학 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 시험지


이 시험의 목적은 고등교육을 마친 학생이 대학에서 정상적으로 학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미달인 학생을 탈락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다. 시험 점수로 순위를 매기는 상대평가가 아니라 등급 확인으로 능력을 검증하는 절대평가다.


오스트리아의 마투라 예를 들어보자. 2020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구술평가가 생략되고 5월 25일부터 6월 4일까지 필기시험만 치러졌다. 시험과목은 공통과목과 선택과목을 합쳐 5~7개이고, 성적은 5개 등급으로 나누어 평가된다. 1등급 매우 좋음(sehr gut)부터 5등급 충분하지 않음(nicht genügend)까지 다섯 단계로 구분되는데, 한 과목이라도 5등급을 받으면 불합격을 통보받고 대학 진학기회를 얻지 못한다.


코로나19 위기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 대학 입학자격시험인 마투라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학에서 수용 가능한 입학정원보다 대학 입학자격시험 합격자 수가 많을 경우, 과연 학생들의 선택이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가능하다. 정말 인기 있는 한두 개 학과를 제외하고는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서 본인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해 공부할 수 있다. "배우고자 하는 누구나에게 교육은 열려 있어야 한다"는 모토를 내건 오스트리아의 '열린 대학'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유럽의 입시제도와 대학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국가마다 처한 상황과 고민이 조금씩 다르기에, 공통분모만을 추려보면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대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너무 많고, 강의실이나 도서관 등 공용시설을 제대로 이용하기 힘들다. 두 번째는 같은 맥락에서 학생들의 학문적인 성취도와 열정이 저하되고 그 결과 졸업까지 걸리는 시간이 예상외로 많이 든다는 점이다.   


종합적으로 평가해보면, 유럽의 중고등 교육은 교과수업에 대한 학업 부담이 적다. 내신이든 종합시험이든, 절대평가로 등급과 점수를 매기기 때문에 경쟁에 따른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 다만 자신이 원하는 전공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지, 어떤 다양한 활동들을 해왔는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대학에 입학해서는 수용능력을 초과한 학생들로 인해 양질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고 관리 소홀로 인한 무관심 속에 방치된다. 대학 졸업장보다 직장경력과 일에 대한 전문성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약해진다.


유럽 교육제도의 사회문화적 배경

 

앞서도 언급했듯이, 유럽의 입시제도와 대학교육이 지닌 특징, 명과 암은 정치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을 이끄는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해서 중북부 국가 대부분은 사회민주주의를 정책 기조로 삼아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 마디로 세금을 많이 걷는 대신, 높은 수준의 복지를 보장한다. 무상교육과 의료보험, 실업급여와 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대표적이다.   


한편 유럽 시민들의 의식 속에는 개인주의와 기독교적 소명의식이 결합되어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신념이 있다. 막스 베버가 강조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의거하여, 사농공상의 차이 없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사후에 신의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이다.


탄탄한 복지 속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추어져 있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기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회에서 대학의 존재는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반드시 대학교육을 받아야만 직업을 가질 수 있는 경우와 순수하게 학문이 좋아서 대학을 선택한 사람에게만 대학은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영미권 국가의 대학과 달리, 대학 등록금이 매우 저렴하거나 무상인 이유는 대학교육도 시민들이 응당 누려야 할 보편적 복지의 하나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갖춘 학생들에게는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원하는 대학과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오스트리아의 교육철학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에서는 대학 진학이 아닌 직업 선택을 목적으로 중등학교 진학 시부터 직업학교를 택하는 비율이 60% 이상이다. 굳이 대학 졸업장이 없더라도 본인이 선택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으면 더 나은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직업 선택에 따른 물질적 보상과 사회적 평가의 차이가 그렇게 크지 않은 유럽 사회에서 대학 진학은 필수가 아닌 선택인 셈이다.


교과성적만이 중요한 사회의 비극


비엔나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는 내 아이의 꿈은 수의사가 되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개, 고양이를 비롯하여 온갖 동물들을 좋아했고 틈만 나면 유기견보호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수의학과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매우 높은 내신등급과 수능점수를 받아야 하기에 거의 포기 상태였다.


마침 집 근처에 비엔나 수의과대학이 있어서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진로상담 선생님과 수의학 전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더니, 여기에서는 학생이 하고 싶은 의지만 있다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문제는 독일어로 치러지는 마투라 시험에 무사히 통과할 수 있느냐와, 입학보다 졸업이 어려운 유럽식 대학교육을 잘 버텨낼 수 있느냐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위치한 비엔나 수의과대학 : 입학하기는 쉬어도 2019년 세계 31위를 기록한 명문대학이다.


또 하나의 대안은 영미권 대학에서 수의학을 전공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1학년과 12학년 2년 동안 진행되는 IB 과정에서 대학이 요구하는 점수를 획득하고, 자기소개서를 통해 본인의 열정과 자원봉사활동 등 다양한 실적들을 담아내야 한다. 이 역시 입학보다 더 힘든 졸업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에 비해 현재 한국의 입시제도는 내신성적 위주의 수시입학과 수능점수로 결정되는 정시입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시평가 시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여 교과 이외의 능력을 평가한다고 하지만, 대학의 선발 자율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결국 성적 중심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다. 단, 힘들게 입학만 하면 졸업은 거의 보장된다.


결국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다만 교과목 암기와 이해 능력이 한 아이의 미래를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변수가 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창의력과 추진력, 열정과 경험이 학습 성적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비중을 어떻게 정할지, 평가를 어떤 방식으로 할지는 유럽과 영미권 입시제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장점을 잘 취합하면 된다.


수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내 아이는 지금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평소에 아이가 롤모델로 삼는 강형욱은 고등학교만 졸업했지만, 그 어떤 유명 대학 수의학과 졸업생보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클 뿐 아니라 많은 애견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열정보다 성적을 우선하는 사회에서 또 다른 강형욱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새삼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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