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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Dec 09. 2020

아빠로 살면서 한 번쯤 듣고 싶은 이름, 슈퍼맨~

강철 체력과 순수 동심에서부터 자상함과 배려심까지, 슈퍼맨 아빠의 조건 

때로는 오리지널보다 아류작이 더 인기를 끄는 경우가 있다. KBS가 2013년부터 7년째 방송하고 있는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그렇다. MBC의 <아빠! 어디 가?>가 '육아 예능'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이를 적당히 모방한 <슈돌>이 어느덧 원조 프로그램을 제치고 주말 저녁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슈돌>을 비롯한 육아 예능 방송을 그다지 즐겨 보지 않는다. 아동 인권침해나 과도한 간접광고 등 이미 제기된 많은 문제점들을 차치하더라도, 가족 소장용 캠코더 영상 수준의 내용을 굳이 지상파 방송에서 주말 황금시간대에 편성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나같이 육아를 충분히 경험한 아빠에게는 더구나 새로울 게 전혀 없다.


숱한 논란 속에서도 육아 예능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은 KBS의 <슈퍼맨이 돌아왔다>


이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슈돌>이 우리 사회에 던진 시사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힘든 육아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한걸음 떨어져 있던 아빠들에게 육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주었다는 점, 유명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인 아빠가 아이와 서툴게 교감하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에서 많은 시청자들이 감동했다는 사실 등은 나름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슈돌>에서 처럼, 아이와 단둘이 48시간 동안 남겨진다면 많은 아빠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평소 아이와 교감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모든 게 낯설고 서툴 수밖에 없다. 뭐든 아이를 위해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지다 보면, 아이와 소중한 주억을 쌓기는커녕 기억하기 싫은 악몽이 되곤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육아에 남다른 재능과 열정을 지닌 아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아이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행복하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어 뛰어놀거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능수능란하다. 당신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라. 자상하고 친구 같은 육아계의 슈퍼맨들이 곳곳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슈퍼맨 아빠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아빠는 아이 못지않게 순수하고 해맑은 동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까꿍놀이나 역할놀이를 할 때, 아이만큼 무아지경으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아이는 어른이 진심으로 즐겁게 함께 노는지, 어쩔 수 없이 대충 놀아주는지 귀신같이 알아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대놓고 표현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이상으로 중요한 덕목이 강인한 체력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번쩍 들어 올리기, 빙빙 돌리기, 레슬링 하기 등은 웬만한 헬스클럽의 피트니스 프로그램보다 힘들다. 목마 태우기와 안고 다니기처럼 지구력을 요하는 종목도 있다. 5살 이전에는 걷는 걸 싫어하고 부모 품에 안기려는 아이가 많은데, 며칠씩 함께 여행하다 보면 아빠의 가슴과 팔 근육이 슈퍼맨보다 더 불끈불끈해질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힘쓰는 체력도 필요하지만,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면시간 속에서도 직장생활을 버텨낼 수 있는 불굴의 정신력을 구비해야 한다. 특히 생후 6개월까지는 밤낮이 뒤바뀌는 것은 기본이고 밤에도 3~4시간 간격으로 분유 수유를 해야 한다. 새벽에 아기가 울면 벌떡 일어나 미리 타 논 분유통에 물을 넣어 섞어서 먹이고, 꾸벅꾸벅 졸면서 아이 등을 두들겨 트림까지 시킨 후에야 다시 쪽잠을 청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아이가 어렸을 때 아빠가 슈퍼맨처럼 뭔가를 해주고 마냥 기뻤던 기억도 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던 슈퍼맨의 비애를 느낀 적도 많았다. 아이가 심하게 아플 때가 대표적이다. 나는 태어나서 7개월 정도 지났을 때 장중첩증에 걸려 3번이나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당시 아버지는 베트남전 파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음앓이가 얼마나 심했던지 그 튼튼한 분의 허리띠 구멍이 3개나 줄었다고 한다.  


내가 3번의 대수술을 받고 극적으로 살아나자 수술을 집도한 미국인 의사가 내 부모님보다 더 감격해서 인형을 선물했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이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내 아이가 산후조리원에서 장염에 걸려 일주일 이상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아기에게 링거 주사를 꽂을 때에는 핏줄이 보이면서 말랑말랑한 부위를 찾게 된다. 34년 전 갓난아기였던 나는 양쪽 발 복숭아뼈에 링거를 꽂았고, 이제 내 아이는 머리카락을 모두 제모한 민머리에 링거 바늘을 꽂았다. 아기를 면회하면서 아내는 눈물을 계속 흘렸지만, 나는 가슴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했다.


아픈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참담한 시절을 겪고 난 후에는, 아이가 원하면 언제든 출동 준비를 갖춘 슈퍼맨이 되려고 노력했다. 힘들다거나 귀찮다거나 투정 부리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아이가 최고로 원하는 것은 아빠가 자기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 함께 놀아주는 시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이에게 아빠는 슈퍼맨으로 변신하는 기적이 연출되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어린아이 시절이 지나고 10대에 접어들면, 이제 보다 섬세하고 지혜로운 접근이 필요해진다. 단순한 공감능력이나 력만 믿고 잘난 체하다가는 아이 방에 출입을 금지당하기 십상이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슈퍼맨 자격조건은 아이와 꾸준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아빠가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실천하는 적극적인 태도다.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스쿨버스의 노선을 변경시킨 적이 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가 새로 지어졌기 때문에 아이들 편의를 위해 노선을 바꾸자고, 학교 교장실로 찾아가서 조목조목 설득했다. 당시 학부모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내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슈퍼맨으로 칭송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왜 그렇게 열정이 뻗쳤는지 헛웃음만 나온다.


하지만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들 녀석은 아빠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게 왜 그리 중요한지 잘 알지 못했다. 정작 아빠의 능력에 감탄하고 고마워했던 것은 자기가 가고 싶은 콘서트 티켓을 구해주거나 최신 기종의 휴대폰을 사 줄 때였다. 수많은 지극정성의 시간보다 순간의 물질적 보상이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아서 못내 서운하기도 했다.


내가 추억하는 나의 슈퍼맨 아버지는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고 다니던 자전거의 잠금 줄 열쇠를 잃어버려서 자전거 가게에 갔더니 훔친 걸로 의심하고 무시하듯 나를 대했다. 억울한 마음에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곧바로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자전거 가게에 다시 갔고, 아버지의 호통에 가게 주인은 쩔쩔매며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아버지가 그렇게 멋있을 수 없었다. 내가 억울한 누명에 빠졌을 때, 아버지는 나를 위해 슈퍼맨처럼 등장하여 구해줄 든든한 존재였다. 대대장으로 예편하신 아버지는 군인 특유의 절도와 무게감이 있었다. 힘은 당연히 셌다. 언젠가는 사무실에서 상대방 멱살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려 소파에 내동댕이 치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고등학생 아들과 함께 한 부산여행. 요트를 타고 광안대교 야경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 모습


아쉽게도 백면서생이자 평화주의자인 나에게는 자상함과 배려심이 유일한 무기다. 이제 20대로 접어든 아들에게 아빠가 가장 마음에 들었을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았다. 최신 전자제품 이야기를 하면 혼쭐을 내려고 했는데, 어느새 철이 든 아이는 고등학교 때 아빠와 단둘이 여행한 부산의 추억을 떠올렸다. 비록 으로 우리 아이를 구해주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여행하고 공감하는 나만의 슈퍼맨 아빠 생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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