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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Feb 24. 2021

19&91, 나를 사랑하는 여인들

72년 띠동갑 두 여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한 남자의 행복 플렉스

즐겁고 행복한 순간보다 우울하고 불행한 시간이 많은 게 인생이다. 걱정, 불안, 외로움, 질투 등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감정들은 시도 때도 없이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마음을 뒤흔든다. 물론 자기애가 확실하고 태생적으로 매사에 낙천적인 사람들도 있다. 사실 세상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지 않던가. 하지만 아무리 최면을 걸고 다짐을 해도 기쁜 일보다 괴로운 일이 많은 건 왜일까?


이렇듯 힘든 인생 여정을 살다 보면 누구나 따뜻한 위로와 관심을 갈망한다. 종교를 믿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힘들기만 한 나의 삶을 위안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소중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다. 진심으로 나를 위해주고 나의 모든 행동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축 처진 어깨와 지친 다리에 새록새록 힘이 솟아날 것이다.   

   



가수 이문세가 "그대 사랑받는 난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라고 감미롭게 노래 불렀듯이,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런데 너무나 과분하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 바로 19살 딸과 91세 어머니다. 혹시 아내는 어디 갔냐고 묻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아내도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과 관심의 깊이나 강도에서 이 두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된다.


직장동료나 지인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 항상 내가 조심하는 주제가 있다. 딸 자랑이다. 요즘은 자식을 하나 내지 둘만 낳는 경우가 많기에 아들 또는 딸만 있는 집들이 많다. 딸만 있는 사람에게 아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아무리 자랑해도 크게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만 둔 사람 앞에서 우연찮게 딸 이야기를 하고 자연스럽게 행복한 일상을 전하다 보면, 상대방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시기 어린 반응이 나오기 일쑤다.


물론 모든 아빠들이 딸과 애틋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니다. 거의 남남이거나 원수가 된 부녀지간도 있다. 특히 사춘기로 접어든 중학생 시절에는 아빠 냄새가 싫다고 접근조차 못하게 하는 딸들이 많다고 한다. 아침저녁 인사도 건성으로 하고, 아예 딸 방에 출입이 금지된 서글픈 아빠들도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딸이 10대가 되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어진다. 대화가 단절되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상대방에게 무관심해진다.


그에 비해 나와 딸의 관계는 말 그대로 찰떡궁합이다. 딸은 태어나서부터 19살이 된 지금까지 한결같이 아빠 바라기다. 나 역시 이 세상 최고로 딸을 사랑한다. 딸의 어린 시절, 외국 출장이나 지방근무로 인해 짧고 긴 이별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딸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린 나는 돌아서서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코가 시큰거리곤 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딸은 내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 영상을 함께 보자고 한다. 딸이 좋아하는 BTS 뮤비를 감상할 때도 있고, 우리 모두 관심 있는 반려견 영상을 볼 때도 있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우리 부녀는 이른바 '2030 프로젝트'를 세웠다. 수의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이 2030년에 동물병원을 개원하면, 그동안 펫시터 자격증을 딴 내가 옆에서 도와주며 유튜브 제작도 함께 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나와 딸은 동물병원 의사 선생님과 팻시터로 동업하기로 야심차게(?) 약속했다


얼마 전 19살 생일을 맞이한 딸을 위해 아내와 나는 조촐한 파티를 준비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한 후 케이크에 꽂힌 촛불을 끈 딸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물어보았다. 두 가지를 빌었는데, 하나는 멋진 남자 친구가 생기는 것, 다른 하나는 아빠가 작가로 세상의 인정을 받아서 회사 그만두고 자기와 함께 지내는 것이란다. 세상에나, 딸을 위해서라도 더욱 비장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2014년 12월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을 보노라면, 불과 한두 세대 전에 태어난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들이 얼마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지 잘 알 수 있다. 1931년에 태어나서 올해 91세가 된 나의 어머니도 그런 가슴 저린 인생 굴곡을 겪은 분들 중에 하나다. 


일제 치하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명문 춘천여고를 탁월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남동생들 뒷바라지 때문에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으로 내몰렸으며, 6.25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군인과 결혼하여 60년 이상 해로하다가 몇 해 전 사별하고 혼자 남은 우리 어머니.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전쟁과 베트남 파병 등 파란만장한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아내는 어머니가 결혼 전에 손을 꼭 잡고 했던 말씀을 신기하다는 듯이 웃으며 전해주곤 한다. "얘야 넌 참 좋겠구나, 우리 아이를 만나서. 사실 아들이지만 내 이상형이란다!" 아들을 기특해하고 사랑하는 어머니는 제법 많겠지만, 이상형으로까지 바라보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가 당신에게 정말 그런 말을 하셨어?" 뿌듯함과 민망함이 뒤섞인 나는 질문인지 대답인지 모르는 말로 얼버무려야 했다.


전쟁통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부모가 중매한 남자와 만나 변변한 연애 한 번 못하고 결혼해야 했던 시절, 어머니는 강인한 무골 기질의 직업군인과 평생의 연을 맺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적인 남편이었지만, 자상함과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남자와 한평생 살면서 어머니가 받은 스트레스는 제법 심했다. 게다가 큰 아들은 남편의 성향을 그대로 닮았으니, 이제 믿을 건 늦둥이 작은 아들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바람이 태교의 영향을 받아 내 유전자에 전달되었는지, 둘째로 태어난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소망하던 차분하고 섬세한 성품을 지니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말썽 한번 안 부리고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가만히 앉아서 글 읽는 걸 좋아하는 내가,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닮았다고 어머니는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부부란 볼록과 오목, N극과 S극이 만났을 때 진정으로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것이며,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최고로 훌륭한 반려자였음을.


아버지와 사별한 후 실버타운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어머니는 또래의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90세가 넘었어도 국내외 시사정치에 해박하고, 배구경기를 시청할 때면 좋아하는 선수 이름과 상대전적을 꿰고 계신다. 


그런 어머니가 여전히 궁금해하고 염려하는 건 늦둥이 아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여부다.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머니 건강이나 잘 챙기시라고 해도, 90대 노모는 당신의 이상형인 50대 아들에게 항상 몸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딸의 19살 생일파티가 있은 후 2주 뒤에 어머니의 91세 생신 모임이 있었다. 딸의 생일을 축하하고 바로 다음날 비엔나에서 서울로 귀국한 나는 14일 동안의 코로나 자가격리를 마친 후에, 이번에는 어머니의 생신을 함께 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72년 차이 양띠 두 여인, 내가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힘이 되어주는 딸과 어머니가 태어난 날을 극적으로 기념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감격스러웠다.


중년의 나이가 되어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보니, 한때 남부럽지 않게 잘 나간 적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모자라지 않지만 넘치지도 않는 삶. 힙합 신에서는 남들에게 재력을 과시하는 것을 플렉스라고 부르며 자연스럽게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다. 아무래도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플렉스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는 나의 가족, 그중에서도 나를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딸과 어머니의 존재다.


언제나 한결같이 나를 믿고 응원해주는 두 여인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씩씩하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다. 부디 원하는 인생 행복하게 살기를, 부디 아무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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