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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Feb 20. 2021

세로 아닌 가로, 명사 아닌 동사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명성보다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

누군가 세로로 우릴 세우려 해
나란히 가로가 어울린 우릴
사다리 주며 빨리 올라 따라잡으라 해


2017 월간 윤종신 1월호 앨범에 담긴 <세로>라는 노래 가사다. 정신없이 살다가 잠시 쉼표를 찍고 숨을 고르던 시절, 나는 운전하는 차 안에서 우연히 이 노래를 들으며 만감이 교차했다. 겉으로는 서열을 강조하는 문화를 질색하며 싫어했지만, 실상 내 인생은 '세로'의 꼭대기를 바라보며 자만과 위축 속에서 수없이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우리의 경쟁력은 학창 시절 치열한 상대평가를 통해 단련되어 왔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순수한 호기심을 지닌 채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이내 교과성적으로 모든 게 평가되는 교육시스템 속에서 주눅 들고 적응해야 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선생님께 인정받기 위해서는 같은 반, 같은 학년 친구들을 제쳐야만 했다. 정말 궁금해서 단순 무식한 질문을 했다가 선생님에게 짜증스러운 무시를 당했던 나는 이후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세로'의 절정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1등부터 8등, 9등부터 16등, 이런 식으로 성적에 따라 지정된 줄에 앉아야 했다. 줄 이동은 한 달에 1번 이루어졌는데, 마치 프리미어리그 승격과 강등처럼, 등수 경계에 있는 친구들은 매번 줄이 바뀌곤 했다. 학생의 인권과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폭력적인 서열화에 응당 분노해야 했건만, 당시의 나는 내가 속한 줄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쓰며, 나보다 밑의 줄에 앉은 친구들을 무시하듯 대하곤 했다.


모든 걸 스펀지처럼 받아들였던 풋풋한 10대 시절과 떨어지는 낙엽에도 마음이 아련해졌던 섬세한 사춘기 기간 내내, 우리는 상대평가라는 도구로 뼛속 깊숙이 주입된 '세로'의 가치관을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마침내 학교를 졸업하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조직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그곳에는 지연과 학연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세로' 평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 대학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서열 구조로 평가되고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는 서열+패거리 문화가 만연한 조직에서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지 않는 한, 그 한계를 극복하기 힘들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에서 알 수 있듯이, 당연한 듯 순응해야 하는 '세로' 가치관에 예외적인 사례가 발생하면, 우리 사회의 '세로'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층은 이를 애써 무시하거나 아예 인정하지 않는 전략을 구사한다.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한 어느 날, 선물처럼 내 책상에 놓인 명함을 보고 마음이 마냥 설레었다. 그냥 학생 신분이었던 '무명 씨'와 조직의 당당한 일원이 된 직장인의 차이를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이후로 나의 존재는 어느 회사 어느 팀 직원 또는 팀장으로 정리되었다. 보직을 맡게 된 이후에는 상대방이 굳이 받으려 않아도, "내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자랑하기 위해 명함을 건네곤 했다.  


'세로' 문화가 명함과 만나게 되면, '명사' 사회가 완성된다. 소속과 직위로 상징되는 '명사' 타이틀은 대다수 직장인들의 로망이자 목표가 되었다. 실제로 맡은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과정으로 그 자리에 올랐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결과로 보이는 명함 속 '명사'로 우리는 자신을 설명하고 타인을 평가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수년 동안 거주하면서, 나는 그동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명사'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곳 사람들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소속과 직책을 앞세우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고, 본업 이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취미활동이 무엇인지를 신나게 설명해주었다. 직위라는 '명사'보다 활동이라는 '동사'를 통해 자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자 했다.


브런치에서 다른 작가의 소개글을 가끔 보게 된다. 자신의 직업과 직위를 과거 경력까지 포함해서 빼곡히 적어놓은 사람들을 보면 쓴웃음이 나곤 한다. 몇 줄 안 되는 브런치 자기소개조차 빈약한 상상력으로 '명사'만을 강조하는 사람의 글에서 내가 감동받을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분야는 정치와 언론이다. 그런데 묘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두 영역 모두 실제로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확인하려는 '동사형' 평가보다, 어느 명문대 출신인지 어떤 타이틀과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는지로 판가름되는 '명사형' 과시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무릇 훌륭한 정치인이란 지역의 풀뿌리 정치부터 경험하고 시민들과 동고동락을 한 사람 중에서 등장하기 마련이다. 다른 분야에서 쌓은 뛰어난 업적을 기반으로 정치에 입문했다면, 최소한 수년 동안 철저하게 정치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한국 정치의 비극은 '세로' 사회에서 '명사' 타이틀로 무장한 엘리트들이 정치의 역동성과 포용성에 무지한 채 인재영입 방식으로 성급하게 들어와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고 허세를 부린 데에서 비롯되었다.


방송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을 세련되게 기획하고 불굴의 의지로 취재해야 하는 PD와 기자 인력을 선발하기 위해 국어와 영어, 논술 테스트를 실시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방송쟁이'로서의 끼와 재능을 발견하기 힘든 교과 우등생들이 공채기수라는 갑옷으로 무장하고 사무실에서 행정사무를 보며 억대 연봉을 받고 있는 것이 우리 지상파 방송의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방송보다 엘리트주의가 몇 배 더 심한 신문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타고난 끼와 열정이 아닌 국영수 중심의 고시 점수로 평가하는 한국의 방송사 채용방식


사람이 보유한 능력의 일부분에 불과한 10대 시절의 국영수 학습능력을 기준으로 '세로'로 줄 세워 평생의 평가척도로 삼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자신이 속한 조직과 맡고 있는 직책을 빼면 자신의 정체성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명사형' 인간이 대다수인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세로'가 아닌 '가로'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그 사람만이 가진 능력과 개성을 존중하게 되고, 이렇게 각자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를 분노케 하는 갑질과 미투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명사'가 아닌 '동사'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와 그동안 얼마나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는지를 편견 없이 평가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채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돌아온 나의 일상. 부러우면 지는 걸 알면서도 세로로 촘촘히 서열화된 조직 속에서 권력과 재력을 과시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나에게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본캐로서 돈을 버는 회사 업무와 부캐로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를 병행하는 일도 생각보다 힘들다. 하지만 직장에 매몰된 채, '세로' 문화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나의 빛나는 성취가 '명사' 타이틀에 달려 있다고 굳게 믿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노라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지금이 행복하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직'이 아닌 나를 충실히 만들어가는 '업'을 지향하는 나의 작은 실천이 하루하루 쌓이고 여기에 당신의 공감이 더해진다면, 우리가 바라는 '가로'로 함께 어울린 사회가 조금 일찍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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