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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Mar 15. 2021

무소유의 행복, 법정을 그리워하다

스님의 법향이 가득 배어 있는 송광사 불일암에 다녀오다

4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으로 격변의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청년, 전남대 상대를 다니다 출가하여 법향 그윽한 인생을 살아온 사내, 성철스님이 "펜대를 바로 세우고 글을 쓰는 유일한 스님"이라고 평가한 우리 시대의 참된 어른. 바로 법정이다.


살며시 불어오는 봄바람이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3월이 되면, 나는 언제나 법정스님을 떠올린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2010년 3월 11일, 수많은 신도들의 애도와 눈물 속에서 스님은 열반했다. 영결식도, 오색 만장도, 연꽃 상여도 없이, 그저 대나무 평상에 가사를 덮은 채 아름답고 향기롭게 이생을 마감했다. 어느덧 다시 찾아온 봄날 아침, 나는 그리운 마음 가득 담고 송광사 불일암으로 떠났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의 하나인 승보종찰의 근본도량이자, 가장 많은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다. 신라 후기 혜린선사에 의해 송광산 길상사로 창건되었고,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참선을 중요시하는 선종사찰로 재건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송광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법정스님의 무소유길을 따라 걸으며 사찰 곳곳에 배어있는 그의 향기를 음미한다.


송광사 어귀에 들어서면 불일암으로 바로 가는 길과 송광사 탑전을 거쳐 불일암으로 가는 길로 나뉜다. 나는 불일암으로 가는 화살표 방향의, 검분홍 아스팔트가 깔린 가파른 언덕길을 택했다. 숨이 차고 다리가 뻑뻑해질 정도가 되니 흙길로 바뀌면서 경사가 완만해졌다. 이번에는 나무기둥으로 계단을 만든 숲 속 오솔길이 나왔다. 길옆에 새겨진 스님의 법언을 읽으며 쉬엄쉬엄 올라가자 수백 그루 대나무 숲길 사이로 불일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일암은 고려 충렬왕 시기 송광사 16국사 중 7대 자정국사가 만든 자정암 폐사 터에 법정스님이 목수들과 함께 거처를 짓고 편액을 걸어 만들어졌다. 유신체제로 전국이 얼어붙던 1975년 10월의 일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무도한 폭력에 맞서 불교계를 대표하여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운영위원으로 참여했던 법정은 함석헌, 장준하, 천관우 등 당시 민주 재야인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그러나 이른바 인혁당 사건으로 23명이 구속되고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진 8명에게 불과 20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형이 집행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깊은 번민 끝에 다시 구도자의 길을 택한 법정은 봉은사 다래헌을 떠나 송광사 불일암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모든 직함을 버리고 손수 지은 불일암에 칩거하며, 법정은 한 달에 한 편씩 글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이 과정에서 불일암 안거 1년 만에 처음 책으로 발간된 것이 바로 <무소유>다.  

    

불일암 표시판과 주변 풍경(좌), 정면에서 바라본 불일암 모습(우)


나는 지금 불일암 앞에 서 있다. 40여 년 전 법정스님이 참선하고 공양하고 산책하던 바로 그 자리다. 스님의 가르침에 전혀 못 미치는 인생을 살고 있기에 감격스러운 마음보다는 부끄러운 감정이 앞섰다. 생전에 스님이 좋아했던 후박나무 옆에 보일 듯 말 듯 스님의 유골이 묻힌 곳이라는 표지가 보였다. 그 앞에 서서 합장하고 기도했다. 부디 스님의 깨달음이 나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기를, 부디 스님의 말씀이 내 인생의 지향점으로 밝게 빛날 수 있기를.




내가 법정스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중학생 시절 신문 칼럼을 통해서였다. 법정스님이 자연의 소중함을 주제로 기고한 칼럼을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학교에서 백일장이 열렸고, 나는 '하늘'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스님의 칼럼 일부를 인용했다. 아빠와 함께 숲길을 거닐던 아이가 "아빠, 여기는 공기가 달아!"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다. 신선한 공감각적 표현이라 머리에 담아두고 있었는데, 마침 적절한 활용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쓴 산문은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았다. 그리고 평가를 담당한 선생님이 나중에 알려주셨다. 전개과정에서 꼭 필요한 사례를 잘 인용했다고. 말하자면 스님 덕분에 내 글쓰기 실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후 대학생이 되어 <무소유>, <산방한담>, <산에는 꽃이 피네> 등 스님의 담백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책들을 읽으며 생각의 폭을 넓히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달콤한 소비문화에 이미 익숙해버린 나에게 스님의 가르침은 공허하게 들리거나 범접하기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법정스님에게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7년 12월 길상사 창건법회에서 스님이 대표로 법문을 전하고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을 무렵이었다.


내가 먹고사는 일에 바쁘고, 연애하고 결혼 준비하는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통해 꾸준히 사람들을 교화하고 우리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며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마음, 내가 많이 가진 것을 퍼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맡아놓고 있던 것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실천.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맑게 하고 향기로운 실천을 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님은 무심하기만 했던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나갔다. 다음 생으로 말과 글의 빚을 가져가고 싶지 않다면서 자신의 쓴 모든 책을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님이 살아 있을 때에는 존재의 깊이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다가 열반하고 나서야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서둘러 스님의 가르침을 찾으려 했지만 이제 그의 이름으로 세상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후학들이 정성스럽게 엮은 법문집과 전기소설만 있을 뿐.




"중은 믿을 게 못 된다. 집 버리고 떠나온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 법정에게는 죽비처럼 날카로운 가르침뿐만 아니라, 모두를 즐겁게 하는 유머감각이 있었다. 부엌살림을 하는 시자와 보살을 위해 음식 만들 때 외우는 진언이 있다고 하고는 "옴 맛나 맛나 사바하, 옴 맛나 맛나 사바하"를 능청맞게 부르기도 했다.


법정의 글에는 불필요한 수식어와 미사여구를 발견하기 힘들다. 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와 고문도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가 알아듣기 쉬운 문장과 논리로 자신의 사상을 간결하게 전달한다. 법정의 가르침에 진정으로 머리를 숙이는 이유는 그의 승려생활이 말 그대로 지행합일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편한 길을 택할 수도 있었지만, 법정은 청빈한 삶과 텅 빈 충만의 명상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중생의 고통과 함께 하며 우리보다 더 아파하고 불의와 맞서 싸운 스님. 정치권력과 타협한 제도권 종단을 질타하고, 언제나 암자에서 홀로 수행하며 글로 세상과 소통했던 스님.


나는 오늘 스님의 법향이 그윽하게 배인 불일암에서 새순 돋는 꽃망울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나무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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