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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Dec 12. 2020

잠시 이별이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야

아이를 키우며 맞닥트리는 다양한 이별 순간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

살아가다 보면 크고 작은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헤어지면 다시 만나게 되고,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는 게 인생이건만, 우리는 여전히 이별에 서툴다. 특히 어릴 적 경험하는 이별은 영원히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마음은 쓰려도 덤덤하게 이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세파에 찌든 어른이 되었다는 슬픈 반증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어찌 보면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부모의 모습을 기억하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할 무렵에는 아침에 출근하는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는다. 가지 말라고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이와 헤어지려니 마음이 한없이 저려온다. 불과 10시간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동의 상봉을 반복하는 것이 민망하긴 하지만.


아침에 아빠와 쿨하게 헤어지면서 뽀뽀를 할 정도로 여유로워진 아이에게는 더 큰 난관이 기다린다. 매일 어린이집에 가야 하는 미션이 그것이다. 유난히 어린이집을 낯설어했던 딸아이를 어린이집에 겨우 맡기고 돌아서던 첫날 아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닫힌 문 안쪽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목이 쉴 정도로 아빠를 부르는 딸에게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았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 딸은 콧노래를 부르며 어린이집을 찾아갔다.


3살짜리 우리 딸이 처음 사회화를 경험한 어린이집은 아파트 1층의 가정집 겸용이었다


3살 많은 아들은 아무래도 여동생보다는 이별에 의연했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고 외할머니가 갓 태어난 동생을 돌봐주던 힘든 육아 시절에 아들은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하루 종일 보살핌을 받았다. 퇴근하자마자 서둘러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아들 혼자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이 아련하다.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징표 중에는 눈송이처럼 하늘 가득 날아다니는 민들레 홀씨를 빼놓을 수 없다.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 새로운 땅에서 다시 피어나게 될 민들레 씨앗에는 '이별'과 '행복'의 꽃말이 함께 담겨 있다. 당장은 기약 없이 떠나야 하는 이별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먼 훗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활짝 만개한 노란 민들레꽃은 사람들에게 감사와 행복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린아이들에게 미래를 기약하며 눈앞의 헤어짐에 차분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도쿄 하네다 국제공항을 눈물바다로 만든 이별 장면은 아이와의 헤어짐이 얼마나 힘들고 요란한지 알려준다. 당시 나는 도쿄에서 가족여행을 하고 주말 휴식 후 그다음 주부터 출장을 수행하는 일정이었다.    


나와 아내는 8살 아들, 5살 딸과 함께 도쿄 디즈니랜드와 하코네 온천마을에서 4박 5일 동안의 즐거운 추억을 쌓았다. 문제는 아빠만 남기고 모두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공항 길에서 발생했다. 본능적으로 이별을 예감한 딸아이는 공항 가는 셔틀버스에서부터 칭얼대며 아빠 품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남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공항이 떠나가라 우는 딸과 겨우 헤어지는 데 성공하고 한숨을 돌리며 돌아서는 순간, 내 손에 있어야 할 출장서류 가방이 사라진 걸 깨달았다.   


딸과 눈물의 이별을 나눈 하네다 공항 출국 터미널


내가 멘붕에 빠져 어쩔 줄 모르는 사이에, 탑승구로 막 들어가려던 아내가 상황을 직감하고 공항 안내데스크로 뛰어갔다. 결국 우리가 타고 온 셔틀버스가 공항 터미널을 빠져나가기 전에 두고 내린 서류가방을 다시 찾는 데 성공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아이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다가 멀쩡히 다니던 직장과 생이별을 할 수도 있었다.


딸아이와 나눈 일상 속 이별의 아픔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지만, 하네다보다는 강도가 약해졌다. 딸이 12살 되었을 때, 나는 지방근무를 하게 되어 주말에나 가족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짐을 챙겨 떠나는 나를 배웅하는 가족에게 금요일 밤에 보자고 말했다. 모두 웃으며 손을 흔드는데, 갑자기 딸이 울먹거리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직은 아빠와의 이별이 서글픈 10대 소녀였다.


공항에서 막무가내로 뻗대며 울던 5살 딸이, 지방근무 가는 아빠를 배웅하며 울먹이던 12살 소녀가 이제 어엿한 17살 숙녀로 성장했다. 부쩍 자란 몸과 넉넉한 마음을 가진 딸은 외국에서 대학 다닐 계획을 짜고 미래의 남친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며 나를 놀라게 한다.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이별은 딸보다 나에게 더 큰 슬픔을 안겨주리라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오늘도 잠자리에 누워 괜한 이불만 뒤척인다.    




작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직업군인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초등학교 6년 동안 여섯 번의 전학을 했다고 고백했다. "늘 낯선 곳에 도착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투리에 적응하고, 규칙이 다른 놀이를 배워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담히 적은 문장을 읽으며, 나는 잦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내면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아픔을 상상했다.


공교롭게도 김영하와 비슷한 연배인 나 역시 아버지가 직업군인이었고, 영관 장교였던 부친은 수시로 부대를 이동하며 근무해야 했다. 다만 우리 가족은 서울에 그대로 거주하고 아버지만 부임지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나의 유년시절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인근에 다른 초등학교가 생기면서 멀쩡히 잘 다니던 같은 반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서럽게 울었던 기억 정도가 고작이다.


아버지의 배려로 유목민이 아닌 정착민 생활을 누리게 되었지만, 정작 나는 아버지의 오랜 부재 속에서 헤어짐보다 만남이 더 어색한 부자지간이 되어 버렸다. 이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에 대한 기억의 강도는 희미해지고 그리워하는 감성 역시 약해진다.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부족하니, 대화의 주제도 빈곤해진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정작 나의 유년시절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잠시 이별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이별은 살아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슬픈 헤어짐이 된다. 이제 구순에 접어든 어머니는 얼마 전 병원에서 연명 중단서를 작성했다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잘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씩씩하게 말씀하셨다. 자식과의 마지막 이별이 간결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며 죽음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예정된 이별이든, 갑작스러운 헤어짐이든,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방법이 중요하다


아빠가 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짧은 이별의 순간도, 긴 헤어짐의 기간도 될 수 있으면 겪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아빠의 시간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적어도 아이들이 아빠를 필요로 할 때까지는. 돌이켜 생각해보니,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던 아빠의 역할을 어느 정도는 달성한 것 같다. 이제 아이들은 이별의 아픔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다. 헤어짐의 아픔은 오히려 나의 몫으로 남았다.


이별에는 기술이 필요하고, 헤어짐에도 방법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아이들을 위한 든든한 울타리로 존재했다면, 이제는 울타리 문을 활짝 열고 아이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낼 시간이다. 반가운 얼굴로 웃으며 돌아와 자랑스럽게 떠들 때도 있을 테고, 풀 죽은 모습으로 조용히 찾아와 위로를 받으려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언제든 한결같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기다리기 위해서라도, 이제 나는 아빠만의 시간을 조금씩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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