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이 크게 벌어졌다. 동영상 스트리밍 방식으로 글로벌 방송영상 유통시장을 장악한 넷플릭스(Netflix)가 오리지널 킬러 콘텐츠 확보를 위해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투자하기 시작했다. 넷플릭스의 화력지원을 받은 국내 제작사들은 탄탄한 스토리와 화려한 영상미를 갖춘 웰메이드 작품을 연이어 출시했고, 전 세계 인기순위에서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2016년 1월 한국에서 서비스를 개시한 넷플릭스는 영화와 드라마를 중심으로 제작투자를 하면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왔다. 특히 2021년에는 전년대비 2.5배 증가한 8400억 원을 투자하여 K-콘텐츠를 제작 지원하고 판권을 확보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기존 '넷플릭스 서비스 코리아'와 별도로 콘텐츠 수급과 투자를 전담하는 '넷플릭스 엔터테인먼트 코리아'를 2020년 9월 설립했다.
넷플릭스와 국내 제작사와의 계약은 제작지원과 독점 유통권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은 총 제작비 400억 원 중 70%(280억 원)를 넷플릭스로부터 지원받는 대신, 본방 이후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 시리즈로 유통되었다. 최근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는 <오징어게임>은 총 제작비 2140만 달러(약 253억 원)를 투자하여 1조 원 이상의 수익을 넷플릭스에 안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tvN에서 방영된 <미스터 선샤인>은 스튜디오드래곤의 제작역량과 넷플릭스의 적극적인 투자로 더욱 빛을 발했다.
넷플릭스 역사상 가장 큰 인기와 수익을 얻은 <오징어게임>
넷플릭스는 영화의 경우 작품 단위로 투자를 하지만, 드라마 분야에서는 아예 역량 있는 제작사와 다년 계약을 체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CJ ENM의 자회사인 스튜디오드래곤과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동안 총 21편(연간 7편)의 드라마를 공급받는 조건으로 1000억 원(업계 추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제이콘텐트리의 자회사 JTBC콘텐츠허브와도 2020년 상반기부터 3년간 20편의 드라마를 제공받는 계약을 비슷한 액수로 체결했다.
가뭄에 단비 같은 넷플릭스의 공격적인 투자에 국내 방송영상 시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단순히 제작지원에만 마무는 것이 아니라, 강남역에 추락한 우주선 퍼포먼스를 보여준 영화 <승리호>처럼 기발한 마케팅과 홍보전략을 펼치기도 한다. 넷플릭스 입장에서 보면,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유통 판권을 독점함으로써 투자 대비 5배 이상의 수익을 거두었으며 향후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한국의 방송영상 제작환경은 넷플릭스의 국내 진출 전과 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넷플릭스가 드라마와 영화를 비롯한 방송영상 콘텐츠 시장의 최강자로 떠오르기까지, 우리가 겪어온 지난 시절의 웃픈 모습들과 앞으로 예상되는 장면들이 궁금하다면 지금부터 소용돌이치는 방송영상 파노라마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20세기 인류를 놀라게 한 발명품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텔레비전이다. 라디오로 소리만 듣던 시절에, 전파신호를 받아 볼록한 브라운관 TV 수상기로 처음 방송을 시청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서는 1960년대 KBS, TBC, MBC가 차례로 개국하면서 본격적인 TV 방송시대로 접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바람이 세게 불면 화면이 불안정했으며, 그럴 때마다 지붕에 설치한 안테나 위치를 조금씩 바꿔야 했다.
1950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한 컬러방송이 정확히 30년 뒤인 1980년 한국에도 도입되었다. 흑백으로만 보던 TV 프로그램을 컬러로 보게 되자 시민들은 환호했다. 신군부의 방송 통폐합으로 인해 비록 볼 수 있는 채널은 KBS와 MBC 2개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컬러풀한 드라마와 광고를 본 시청자들은 마치 신세계를 경험하는듯한 경이로움을 느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국내 방송시장은 격변한다. 1990년 상업방송 SBS가 출범하면서 공민영 방송시대가 개막했고, 1995년 다채널 전문방송을 표방한 케이블TV가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제 시청자들은 자신의 취향에 맞게 24시간 뉴스전문채널, 드라마 전문채널, 스포츠 전문채널을 원 없이 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큰 차이점은 전파가 아닌 광케이블을 통해 TV 신호가 전달되고, 월정액으로 돈을 지불해야만 시청할 수 있는 유료방송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1995년 3월 1일 서비스를 개시한 케이블TV를 통해 한국은 다채널 전문방송의 시대로 진입했다
마침내 21세기가 막을 올랐다. 2001년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가 서비스를 개시하면서 케이블과 위성을 통한 양대 유료방송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치적인 논란 속에서 4개의 종합편성 채널이 허가되었다. 여기에 초고속 인터넷망을 활용한 IPTV가 등장하면서 방송과 통신이 융합된 스마트 디지털 시청환경이 실현되었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보던 동영상을 집에 와서 태블릿이나 IPTV로 이어서 보는 N스크린 시대가 우리 앞에 성큼 다가왔다.
이 시기 또 하나의 경이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다. 2006년 삼성이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의 TV 수상기 판매기업이 된 것이다. 아날로그 시절 세계를 호령하던 명품 소니 TV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삼성에 따라 잡히더니 끝내 역전되었다. 이후 삼성은 한국을 뛰어넘어 글로벌 명품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2020년 3분기 기준 삼성은 전 세계 TV 판매금액의 33%(93억 달러)를 달성하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LG가 17%로 2위를 기록했다. 소니는 10%로 3위에 머물렀다.
이미 반도체와 LCD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한 삼성이 그 여세를 몰아 TV 판매대수와 매출액 모두 세계 1위 자리에 오른 바로 그 2007년에, 미국의 그저 그런 비디오 대여업체 중 하나였던 넷플릭스는 장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혁신적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물리적인 장치(VHS와 DVD)에 영화를 담아 대여해주던 시스템에서, 동영상 스트리밍 방식으로 영화를 올리고 온라인으로 원하는 작품을 검색해서 볼 수 있도록 전환한 것이다.
세상 무슨 일이든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없다. 1997년 넷플릭스를 창업한 리드 헤이스팅스는 고객 입장에서 항상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고민했다. 당시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간 VHS를 제때 반납하지 않으면 연체료를 내야 하는 방식에 의문을 품은 그는, 월정액을 낸 이용자에게 원하는 비디오를 무료로 배달하고 반납을 대행하는 서비스를 선보였다.
이후에도 헤이스팅스는 월정액 회원이 영화에 매긴 평점을 토대로 이용패턴과 취향을 분석한 후 선별적으로 비디오를 추천해주는 모델을 도입했다. 현재 넷플릭스가 제공하고 있는 빅데이터 기반 하이브리드 알고리즘 추천 서비스의 초기버전인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현재의 넷플릭스를 가능하게 만든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본격적으로 개시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남미, 유럽, 아시아 등 세계 시장으로 거침없이 진출했다.
넷플릭스의 창업자이자 CEO 리드 헤이스팅스(좌), 2019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문화혁신포럼에서 기조연설하는 헤이스팅스(우)
2011년에 넷플릭스는 또 하나의 상식파괴 전략을 감행한다. 방송영상 콘텐츠를 유통하는 서비스를 뛰어넘어 오리지널 작품 확보 차원에서 제작시장에 직접 뛰어든 것이다. 사실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하고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속성이며, 근본적으로 유통과 제작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 넷플릭스가 유통과 제작을 아우르는 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건 당연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넷플릭스는 2012년 18억 달러를 시작으로 매년 콘텐츠 투자액을 증가했고 2020년에는 160억 달러(18조 원)를 쏟아부었다. 이는 넷플릭스의 2019년 매출액 202억 달러의 75%에 해당하며, 2위인 아마존프라임의 70억 달러보다 2배 이상 많은 금액이다. 세계 190개 국가에서 유료 가입자 2억 명 이상을 확보한 넷플릭스는 2020년에 전년대비 24% 증가한 25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고속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국내 방송영상계를 강타하고 있는 '넷플리스 블랙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나는 투자의 규모 못지않게 콘텐츠 제작을 지원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넷플릭스는 일단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영상콘텐츠에 대해서는 단서와 조건을 달지 않을뿐더러 제작진에게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는다. 사실 크리에이터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만이 최고의 성과를 내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업계의 진리다.
그동안 국내 방송영상 시장은 편성권을 무기로 갑질을 일삼는 방송사들과 빠듯한 예산으로 인해 제작여건이 날로 황폐해가는 제작사들이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방송사의 입맛에 들기 위해서는 어떡해서든 A급 배우를 섭외해야 했고, 자체제작비 마련을 위해 간접광고와 협찬을 스토리에 녹여내야 했다. 쪽대본과 밤샘 촬영이 일상화된 가운데 제작 스태프와 보조출연자는 열악한 처우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넷플릭스의 통 큰 투자방식은 방송사에게는 두려움을, 제작사에게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뛰어난 역량을 지닌 한국의 드라마 제작사들은 이 기회를 활용하여 그동안 쉽게 시도할 수 없었던 블록버스터급 대작과 참신한 소재의 작품들을 마음껏 기획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당분간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억울한 상황이 지속되겠지만, 글로벌 OTT 시장이 성장하는 추세에 맞춰 국내 제작사들은 점차 우월한 지위에서 협상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이후 세계 방송영상시장은 글로벌 OTT 기업들의 진격 속에서 국내 OTT 기업들의 힘겨운 방어가 이어질 전망이다
당장의 유불리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넷플릭스가 깔아놓은 전 세계 유통망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한국의 완성도 높은 드라마와 영화를 소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K-드라마를 판매하기 위해 해외 마켓에 참가하여 발품을 팔고, 외국 바이어를 초청하여 홍보하는 오프라인 중심의 마케팅에 더 이상 힘을 쏟을 이유가 없어졌다. 넷플릭스의 제작지원을 받은 오리지널 작품이든, 자체 제작한 드라마든 얼마든지 전 세계 시청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물론 모든 현상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웨이브(SK텔레콤+지상파 3사)와 티빙(CJ ENM+JTBC) 등 국내 OTT 사업자들에게는 넷플릭스가 버겁기만 한 경쟁상대다. 사업의 존폐를 고민할 만큼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항상 위기 속에 기회가 찾아온다. 구글의 거센 도전을 견뎌내고 네이버와 카카오가 국내 점유율을 높여왔듯이, 웨이브와 티빙도 혁신적인 경영전략과 오리지널 콘텐츠 확보, 국내외 메이저 제작사와의 합종연횡을 통해 가치를 높인다면, 얼마든지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다.
모두를 긴장시키며 21세기 방송영상시장의 키 플레이어로 등장한 넷플릭스가 현재의 압도적인 파워를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글로벌 OTT 기업들과 국내 사업자들이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하여 위기를 헤쳐 나갈지 자못 흥미롭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웰메이드 드라마와 애니메이션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인들을 매료시키고 한류 열풍이 다시 불타오르는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