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진 Apr 15. 2021

잔소리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

일상 속 잔소리와 사회적 작은 목소리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요즘 들어 부쩍 심신이 평화롭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마음의 안정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차분히 반추해보자 진짜 이유룰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아서였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이들이 대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각자의 독립된 인생을 살게 되었고, 그 결과 내 곁을 떠난 아이들에게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잔소리는 듣는 사람만 괴로운 게 아니다. 맞은 학생보다 때린 선생이 더 괴롭듯이, 잔소리 듣는 아이보다 하는 부모의 마음이 더 답답하고 처연하다. "그냥 내버려 둬요. 알아서 잘 크기 마련이에요" 장기 훈수 두듯이, 주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충고하곤 한다. 물론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모두가 잔소리 없는 세상을 바라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잔소리는 마치 공기처럼, 소금처럼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것이다.     




잔소리의 대상은 오지랖의 범위와 비례한다. 잔소리의 세기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과 개입 정도와 일치한다. 요컨대 인간관계가 다양하고 다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많을수록 잔소리는 늘어나고 강해진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지극히 가족 지향적이며 사회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일상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결국 내가 잔소리를 하는 유일한 대상은 나의 아이들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잔소리도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총량 불변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타깃이 아이들로 좁혀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반복해서 무리할 정도로 심한 잔소리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때로는 잘못하다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갈 수 있다는 우려에서, 때로는 내가 그 나이에 겪은 시행착오를 똑같이 반복하는 것 같은 안타까움에서, 아이들을 향한 나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아이유와 임슬옹이 부르는 <잔소리>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 / 내 말 듣지 않는 너에게는 뻔한 잔소리 / 그만하자 그만하자 / 너의 잔소리만 들려" 아이유와 임슬옹이 주고받듯 노래 부르는 <잔소리>는 나와 아이들의 반복된 일상이기도 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큰 아이는 일찌감치 독립 선언을 하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작은 아이도 해외 근무 중인 엄마와 살면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


누군들 좋아서 잔소리를 하랴. 나는 아이들이 아빠의 잔소리에 질색을 할 때마다, '그래 나중에 꼭 너희 닮은 아이를 낳아서 한번 겪어보아라'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이들과 친구처럼 격의 없이 지내길 바라지만, 인생선배이자 아빠로서 마땅히 지적해야 순간에는 잔소리를 참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반복되는 중언부언의 잔소리에 아이들은 종종 질리곤 했다. 과유불급의 비극이라고나 할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유학 중인 큰 아이와 보이스톡을 한다. 아빠가 전하는 대화의 톤이 관심과 당부로 흐르면 아이의 반응은 이내 단답형으로 변한다. "응 알았어", "잘하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아빠의 잔소리가 또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는 아이가 관심 갖는 e스포츠와 NBA, 힙합으로 자연스럽게 주제를 옮기곤 한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하지만, 내 마음은 썩 편하지 않다.  


아이들과 함께 살며 직접 목격하지 않으니 이제는 잔소리할 일이 거의 없다. 글머리에서 말했듯이, 지금 나의 정신건강이 최상을 유지하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 걱정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올 때도 있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은 아이들을 믿고 지켜보는 것밖에 내가 할 일이 없다. 잔소리에 대한 열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이제는 그 대상이 오롯이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 씩씩하고 알차게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잔소리는 부모 자식 관계를 비롯해서 개인 차원에서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그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인 잔소리는 일상의 훈계와 질책과는 달리, 잘게 쪼개진 작은 외침을 뜻한다. 따라서 개인 간 잔소리가 사회적 잔소리로 이동하는 순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권력관계는 역전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징징 대지 마. 너만 힘든 게 아니야"는 식으로 타박받기 일쑤다.


한동안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거시적이고 구조적이었다. 대부분의 종교 사상이 그렇고, 지난 세기를 풍미한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사관이 그러하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아야만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거대담론 전성시대에 살았던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는 진보와 혁명, 정치와 이념, 역사와 운명 같은 묵직한 용어들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여성인권운동이 꾸준히 확산되었고, 프랑스 68 혁명으로 기성정치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반문화운동이 촉발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를 통해 정치 이데올로기 과잉 시대의 종언이 가속화되었고,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이 풍미하면서 가족, 직장, 학교 등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미시 권력관계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도 사회적인 약자들의 작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2014년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과 2018년 김지은, 서지현의 권력형 성폭행 고발 인터뷰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남성 중심의 기득권 문화와 천박한 갑질 횡포 속에서 숨죽이며 인내해야 했던 사회적 약자들이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권력의 미시학을 규명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을 강조한 강준만의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최근 <쇼핑이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책을 출간한 언론학자 강준만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 정치에 큰 기대를 걸기보다는 일상 속 소비행위라는 작은 실천을 통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는 정치적 소비자운동에 주목했다. 투표를 통한 정치권력의 교체가 결국 그들만의 리그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콧과 바이콧을 오고 가는 적극적인 소비활동과 일상 속 작은 목소리의 존재가 더욱 소중해지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작은 행동이나 문구 속에 정작 본질적인 문제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이들에게 말한 잔소리의 대부분은 작지만 기본이 되는 생활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메모하고 기록하는 습관, 외출했다가 귀가하면 옷을 정리 정돈해서 보관하는 태도, 아침에 스스로 일어나고 밤에 스마트폰을 멀리하려는 노력 등  


인생을 논하거나 큰 인물이 되라고 격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하루하루 제 앞가림을 하며 성실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잔치에 불과하다. 누군가 나에게 하는 잔소리는 애정의 표현이자 비상 신호등이다. 초기에 문제를 확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잔소리의 존재가치를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만이 인생의 크고 작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어찌 보면 그동안 잔소리는 성과에 비해 저평가되어 왔다. 심지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잔소리는 훨씬 소중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마음의 평화가 조금 깨지더라도 오늘 저녁에는 간만에 아이와 통화하며 잔소리를 좀 해야겠다. 알아서 잘하고 있다면 주마가편이겠고, 좀 느슨하게 살고 있다면 정신을 다잡을 수 있겠지.


          

  

이전 26화 아니메의 매력에 퐁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