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 화백의 원작을 바탕으로 2007년 개봉된 <타짜>는 최동훈 감독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연출력과 조승우, 백윤식, 김윤석 등의 명연기로 한동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의 백미는 노름판의 진정한 '타짜'가 되기 위한 고니의 혹독한 수련과정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밑장 빼기' 같은 고도의 손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강력한 멘탈을 유지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참고로 나는 화투로 하는 '섯다'나 카드게임 '포커'에서 단 한 번도 돈을 딴 적이 없다. 상대방은 내 얼굴 표정만 보면 어떤 패를 갖고 있는지 뻔히 알았다. 반면에 깜쪽같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상대방 '뻥카'에는 번번이 속아 넘어갔다. 긴박한 상황에서 시선 처리가 불안정하고 표정 관리가 뜻대로 되지 않는 나는 그야말로 '멘붕' 상태에 종종 빠지곤 했다.
쿠크다스처럼 산산이 바스러지곤 하는 나의 멘탈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특별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머리만 쥐어짠다고 될 일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큰 스트레스에 빠졌다. 결국 내가 택한 방법은 어차피 약한 멘탈을 타고났으니 이를 탓하기보다 오히려 당연한 듯 웃으며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현실을 담담히 인정하고 한 걸음씩이라도 조금씩 변화하기.
우리 주위에는 <타짜>의 고니처럼 강한 멘탈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내신 1등급만큼이나 그 비율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시절이 괴롭게 기억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100명 중 4명(4%)만이 1등급을 받을 수 있기에, 1등급을 간절히 원하는 대다수 성실한 학생들은 실패와 좌절의 큰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한 멘탈을 지닌 사람에게 강하게 마음먹으라고 채근하는 건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스럽지도 못하다.
<타짜>는 오리지널의 성공 이후 추가로 2편 더 제작되었다. 하지만 속편은 굳이 안 봐도 된다.
유전적인 속성에서 비롯되었든, 후천적인 환경에서 기인하든, 나를 비롯해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유리 멘탈을 지닌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의 평정심을 깨트릴만한 사건이 발생하면 심한 스트레스와 좌절에 빠지게 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차피 내일의 태양은 떠오를 테니 힘들겠지만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고 일상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누구 못지않게 멘탈이 약한 내가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데에는 주위의 도움이 컸다. 신기할 정도로 내 곁에는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귀인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자면 바로 나의 아내다. 대단히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아내는 매사를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놀라운 장점을 지녔다.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침착하면서도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2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비행기 여행을 많이 했다. 공항은 설렘의 장소이지만, 나같이 멘탈이 약한 사람에게는 뭔가를 분실해서 혼비백산하곤 했던 아픔의 공간이기도 하다. 중요한 서류를 공항버스에 두고 내리거나, 기내 좌석에 핸드폰을 남겨 놓은 채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왔을 때,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나는 멘붕에 빠져서 일단 화장실로 들어갔다. 침착해야지, 침착해야지 하며 변기에 앉아서 차분히 상황을 복기할 때 갑자기 나를 찾는 공항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내가 다 해결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의 멘탈 귀인이 아내였다면 사회생활의 심리 도우미는 친구와 후배였다. 나는 대학원에서 평생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조교 생활을 하며 교수들의 너무나도 이중적인 모습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강의나 글을 통해서는 그토록 고매한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교내에서 특히 조교에게는 쌍욕을 입에 달고 다니며 시정잡배만도 못한 유치한 행태를 일삼는 일부 교수 때문에 우리 멘탈은 항상 요동쳤다.
급기야 친구는 교수 연구실에서 별 것 아닌 일로 구타까지 당했다. 나는 무슨 말로 친구를 위로해야 할지 당황스러웠고, 친구가 원한다면 함께 고소할 마음도 기꺼이 있었다. 도서관 옥상에서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친구가 했던 말이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난 괜찮아. 정말 아무렇지 않아. 단지 그 교수가 불쌍할 따름이야. 얼마나 내면이 망가졌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오히려 내 마음은 편해." 나중에 회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 친구의 마지막 목표는 심리상담사가 되는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끔찍이 따르는 후배를 만났다. 내면의 감정 기복이야 스스로 해결해야 했지만, 외부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 발생하는 사건사고에는 항상 그 후배가 나를 대신해서 발 벗고 나섰다. 자동차 접촉사고를 비롯해서 출장길에 곤경에 처하면 언제든 후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하게도 술자리에서는 언제나 내 말벗이 되었고 흔들리는 멘탈을 바로 잡도록 위로해 주었다.
나이가 든다고 반드시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 수양과 부단한 성찰이 없으면, 어른이 되어도 주위에 민폐만 끼치는 미성숙아 취급을 받는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는 주변의 도움으로 흔들리는 멘탈을 간신히 관리해왔지만, 그런 행운이 언제나 함께 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나만의 인생관과 가치를 차분하게 정립해서 혼자서도 꿋꿋하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매일 정진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네 인생에는 언제나 3개의 자원이 때로는 많이, 때로는 적게 존재한다. 시간과 돈, 에너지(정열)가 바로 그것이다. 10대에는 에너지가 넘치지만 시간과 돈이 부족하다. 20대는 에너지와 시간은 많지만 돈이 없다. 30대와 40대는 에너지와 돈은 충분하지만, 항상 시간에 쫓긴다. 50대 이상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상황이 반전된다. 에너지와 돈은 점점 부족해지는 반면 시간은 풍족하다 못해 무료해질 정도다.
여기에서 멘탈을 관리하는 핵심 포인트가 등장한다. 부족한 자원을 아쉬워하며 한탄하기보다는 풍족한 자원에 감사하며 행복을 느낄 때, 마음의 평화가 다가오고 흔들림 없는 멘탈을 갖게 된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이런 생각을 하며 평점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불쑥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질투와 시기가 치솟기도 했다. 뜻대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인철의 <프레임>과 데이비드 브룩스의 <소셜 애니멀>, 내가 추천하는 최고의 심리서적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식견을 지닌 심리 전문 서적을 탐독하거나 미묘한 심리의 흐름을 주제로 만든 스릴러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다. 지금도 서점에 가면 유리 멘탈을 당장 극복해줄 것 같은 유혹적인 제목의 심리 관련 책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읽다 보면 왠지 하나마나한 카운슬링의 반복에 허무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 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공감하기 힘든 선문답에 질리기도 했다.
그동안 살펴본 심리서적 중에서 그나마 참신한 인사이트가 담겨 있으면서도 흥미롭게 구성된 책은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최인철이 쓴 <프레임 : 나를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와 미국 언론인 데이비드 브룩스의 <소셜 애니멀>이다. 영화 중에는 <유주얼 서스펙트>와 <식스센스> 그리고 <겟 아웃>이 대표적이다. 심리문제를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게 다룬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경험하며, 나는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멘탈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유주얼 서스펙트>(1996)와 <겟 아웃>(2017)은 몇 번을 봐도 긴장감 넘치는 심리 스릴러 명작이다.
타고난 유리 멘탈이 점차 단단한 맷집을 지니게 되었다고 확신한 것은 50대로 접어들면서부터다. 나의 유전자 곳곳에 깊숙이 박혀 있던 동물적 에너지가 튜브에 바람 빠지듯 사라지면서 진정한 '불혹'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남은 인생을 컬처 크리에이터로서 살아가겠다는 '지천명'의 깨달음을 얻게 되자, 일상 속 타인의 시선에 크게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심지를 단단히 세우고 하루하루 나의 계획대로 후회 없이 살면 되었다. 어느덧 나의 멘탈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평온한 상태로 그럭저럭 잘 유지되어 갔다.
멘탈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내 몸에도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 거식증 같은 식이장애와 불면증, 알코올 중독과 심지어 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과도한 스트레스로부터 나온 경우가 많다. 누구 못지않게 유리 멘탈을 지닌 내가 그 정도까지 심각한 상황에 빠지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꼭 필요한 순간에 주변의 귀인이 나를 도와주었고, 나이가 들며 성찰의 지혜가 쌓이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유리 멘탈이 100%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만큼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작가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너무 지나쳐서 편집증적인 증상이 나타나지만 않게 관리할 수 있다면, 창작의 소중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어느 순간 나의 유리 멘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웃으며 공존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리 멘탈의 장점인 감성 충만한 섬세함과 함께, 점차 나이를 먹어가며 부드럽고 여유로운 마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마치 전통가옥의 창호지처럼 은은하게 빛과 바람이 통할 수 있는, 촉촉한 감성과 여유로움을 지닌 그런 멘탈을 간직할 수 있기를, 나는 오늘도 두 손 모아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