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진 Nov 17. 2020

"부자 되세요~" 광고의 숨겨진 코드 읽기

2002년 새해 덕담이 된 광고의 영상미학적, 사회문화적 의미

"여러분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


2001년이 저물어가는 연말 저녁, 집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시민들은 낯설지만 강렬한 광고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눈 내리는 마을을 배경으로 빨간색 스웨터와 장갑, 하얀색 치마와 털모자, 목도리로 치장한 신인 여배우가 연신 부자 되라고 외치고 있다. "당신의 경제를 생각하는 BC카드입니다"라는 남자 성우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무슨 광고인지 알 수 있었다.


21세기 벽두에 최고의 유행어가 된 "부자 되세요!"가 탄생한 순간이다. 2002년 새해 아침이 밝으면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신년 덕담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나 "건강하세요"가 아닌 "부자 되세요"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광고 카피 하나가 수천 년 이어져 온 민족 고유의 새해 인사를 변화시키고, 21세기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당신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부자 되세요~"라는 BC카드 광고를 중심으로, 21세기 광고의 영상미학과 사회적 파급력에 대한 내용이다. 뉴 밀레니엄 시대에 전개되고 있는 미디어와 광고의 마케팅 효과 극대화 전략은 현란할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광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보다 유연한 시각으로 이 현상을 관찰한다면, 우리 시대를 이해는 또 하나의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1월 이른바 "연예인 X파일"이 인터넷을 통해 급속도로 유포되었다. 제일기획이 광고모델 관리 차원에서 주요 연예인들의 매력과 재능, 사생활과 성적 취향 등을 은밀하게 조사한 문건인데, 조사를 진행한 리서치회사 직원이 친구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그만 온라인으로 유출되어 우리 사회를 뒤흔든 스캔들로 비화했다.


여기서 밝혀진 중요한 사실은 제일기획을 비롯한 주요 광고기획사들이 광고모델 후보군인 톱스타들에 대해 비공식적으로 철저한 조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클라이언트인 기업과 광고 제작을 담당하는 기획사에게 광고모델 선정은 사활을 건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 관리가 뛰어난 당대의 톱 연예인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2001년 하반기에 뜨겁게 달아오른 신용카드 광고시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LG카드가 이영애와 배용준, 삼성카드가 고소영과 정우성이라는 검증된 프리미엄 라인을 갖춘 반면, BC카드는 신인급인 김정은을 주연으로 삼고 이문세와 장미희가 부부로 조연을 맡은 광고를 선보였다. 그다음 작품이 장안의 화제가 된 설원의 "부자 되세요"였던 것이다.


붉은색과 흰색의 강렬한 조화, 영화 <러브레터>의 "오겡끼데스까?"를 연상시키는 간절하면서도 담백한 대사,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의 신인 모델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이 광고는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영상미학 측면에서 보았을 때, 눈 내리는 배경을 단순하게 처리하고 모델 중심의 풀샷과 버스트샷으로 교차 편집한 것은 주인공의 모습과 행동, 대사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사실 광고 영상을 제작하고 카피를 뽑는 작업은 우리 시대 최고의 크리에이터들만이 할 수 있다. 순간의 도움닫기와 공중회전으로 승부를 거는 기계체조 뜀틀 종목처럼 TV 광고는 20초 내에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처참하게 외면받는다. 시대의 트렌드를 꿰뚫고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영상과 카피만이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인구에 회자된다.


21세기 광고업계의 화두는 어떤 미디어와 채널에서 어떤 포맷의 광고를 내보내야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느냐로 모아진다. 2020년이 저물어가는 지금은 2001년의 "부자 되세요" 시절만큼 TV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 LG카드를 흡수 통합한 신한카드의 경우, 2018년 11월 광고비 중 TV에 투입된 비용은 0원이었다. 레거시 미디어라 불리는 TV와 신문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반면, 뉴미디어와 모바일의 광고 매력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광고를 전달하는 미디어가 달라지면서, 광고 영상의 길이와 표현에도 변화의 흐름이 감지된다. 2018년 여름 유튜브에 공개된 신한카드의 온라인 광고 "젊은 수학천재의 슬픔"은 4주 만에 조회수 700만을 돌파했다.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스릴러 콘셉트와 웰메이드 영화를 보는 듯한 영상미 그리고 위트 있는 반전까지 1분 정도의 광고 영상에 모두 담아냈다.


배우 신성록이 주연을 맡은 신한 딥 오일카드 온라인 광고 영상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브랜드 저널리즘이나 네이티브 광고처럼, 뉴스 또는 일반 콘텐츠와 광고의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광고인 줄 알면서도 고 퀄리티의 영상과 정보를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PC나 모바일에서 거부감 없이 최대한 많이 볼 수 있게 만드는 이용자 맞춤형 전략도 등장한다. 이제 광고는 상품 홍보라는 전통적인 역할과 함께 당대의 문화와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다. 21세기의 문을 열며 "부자 되세요" 광고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문화적인 관점에서 "부자 되세요" 광고는 IMF 경제위기를 힘겹게 극복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부푼 희망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카드 대란 속에서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금전 만능주의를 부추기는데 일조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한정된 자원으로 제로섬 경쟁을 벌여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도나도 부자가 되려는 탐욕에 불타오른 결과 극심한 빈부격차와 소득 양극화가 초래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든 경제 불평등과 삶의 질 악화에 대한 근본 원인은 "부자 되세요" 광고에 담긴 천박한 배금주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말하고자 하는 취지를 십분 이해하더라도, 광고가 우리의 의식을 결정한다는 '광고결정론'의 함정에 빠져 있다. 또한 광고의 핵심 기능이 자본주의를 위한 소비 확대를 유도하는 것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은 속세의 여전한 진리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광고를 도구로 사용하여 우리 사회의 모순과 대립을 치유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2019년 깐느 광고제에서 최다 그랑프리를 수상한 나이키의 'Just Do It' 30주년 광고는 인종차별에 반대해온 미식축구 선수를 모델로 발탁하여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장애인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게 제작된 이케아 가구와 마이크로소프트 게임 광고도 인상적이었다.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미식축구 선수 콜린 캐퍼닉의 얼굴에 "신념을 가져라,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할지라도"라는 카피를 새겨 넣어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한 나이키 광고


21세기 광고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진화하며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트렌드를 선도하고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광고의 엄청난 힘을 어디에 사용할지 여부는 바로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전 29화 끼니 때움과 소울 푸드, 먹어야 사는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