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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진 Sep 06. 2021

끼니 때움과 소울 푸드, 먹어야 사는 인생

예능과 다큐, 만화와 영화 속에 담긴 음식 그리고 인생 이야기

이래 먹으나 저래 먹으나 한 끼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몸 밖으로 배설되는 음식이건만, 최근 사람들이 요리에 갖는 관심은 거의 광적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음식과 요리 관련 프로그램으로 가득 찬 미디어와 각종 SNS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우리의 이목을 온통 가로채고 있다. 먹는 게 중요한 건 당연하지만, 지금의 이상 열풍에 대해서는 왠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지극히 개인 취향인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은 그렇다 쳐도, 텔레비전에서 이렇게 많은 음식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오랜 기간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해서 TV를 켜면, 한동안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한 채널 걸러 나오는 홈쇼핑 방송에서는 연신 고기와 김치를 세일하고,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먹고 마시는 장면이 수시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최소 1끼 이상 영양분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성인 남성은 1일 3식을 해야만 포만감을 느낀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매번 맛있고 비싼 음식을 먹을 수 없기에, 허기를 때우는 식사를 할 때가 많다. 오래간만에 정말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소문난 맛집에서 시식하는 순간은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끼니 때움과 소울 푸드 사이에서 우리는 오늘도 먹어야만 사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TV에서 다룬 음식 프로그램은 전문 요리사(대개는 중년 여성)와 연예인이 진행하는 <오늘의 요리>와 생활정보 프로그램의 한 꼭지를 차지한 맛집 소개 코너가 전부였다. 셰프라는 단어가 생소했고, 맛 칼럼니스트 같은 음식 전문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2021년 현재 TV를 켜면 전통적인 맛집 소개뿐만 아니라 먹방, 쿡방, 요리대결 등이 쉴 새 없이 방송되고 있다.


이처럼 음식과 요리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예능과 다큐멘터리에서 전방위적으로 만들어진 데에는 백종원의 역할이 지대했다. 2015년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처음 등장한 그는 구수한 인상과 말투, 타고난 예능감을 무기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7년 tvN의 <집밥 백선생>은 평소 요리에 전혀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게 하는 기적을 연출했다.


<오늘의 요리>와 <집밥 백선생>은 준비된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어찌 보면 뻔한 스토리를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양지차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오늘의 요리>가 단순히 시범을 보이며 레시피를 건조하게 설명했다면, <집밥 백선생>은 잘하든 못하든 직접 시도하게 하고 그 차이를 흥미롭게 비교하며 때론 타박하기도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본 시정자들은 웃으면서 빠져들었고, 자발적으로 재료를 사서 직접 조리했다.


나 역시 요리에 숙맥이었고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집밥 백선생>을 보면서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직접 끓였고 계란말이도 멋지게 만들었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가족 모두 인정할 만큼 맛있는 음식을 만들었을 때의 희열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최근 백종원은 <삼겹살 랩소디> 같은 푸드 인문 다큐멘터리도 진행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단순한 요리 시범에서 국민 식생활 개선까지, 그는 사회적으로 선한 영향력이 무엇인지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인간과 물고기의 10만 년에 걸친 투쟁을 화려한 영상으로 담아낸 KBS 웰메이드 다큐멘터리 <슈퍼피쉬>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음식 다큐멘터리는 2012년 KBS가 방송한 5부작 <슈퍼피쉬>다. 생선요리와 초밥으로 익숙한 물고기가 지난 10만 년 동안 인류와 어떻게 만나서 무엇을 변화시켰는지 장대하게 그려냈다. 5대륙 24개국을 누빈 2년의 제작기간과 20억 원의 제작비가 투여된 이 대작 다큐멘터리는 영화 <매트릭스>의 타임 슬라이스 촬영과 수중 HD 초고속 촬영으로 뛰어난 영상미를 선사하기도 했다.


이 작품의 백미는 지중해 한복판에 위치한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산 피에트로 섬에서 촬영한 마탄자 장면이다. 긴 함정 그물로 참치를 유인해 도살하는 지중해식 전통 참치잡이인 마탄자는 죽음을 피해 발버둥 치는 수백 마리 참치와 어부들의 처절한 사투를 담고 있다. 맑고 푸른 지중해 바다가 붉은 핏빛으로 변해갈 즈음 마탄자는 끝난다. 인류의 생존은 결국 다른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가능하다는 잔인한 사실을 압도적인 영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탁월한 프로그램도 있지만, TV에서 방송되는 대부분의 영상 콘텐츠는 단지 먹거리 비주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토불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몸과 정신은 매일 우리가 먹는 음식의 질에 달려 있다. 음식쓰레기를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식생활 문화 개선도 필요하다. 별다른 고민 없이 군침이 도는 요리 장면만을 찍은 음식 프로그램들을 보노라면, 단지 먹기 위해 사는 국민의 서글픈 자화상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사실 음식과 요리를 소재로 탄탄한 스토리를 갖춘 작품의 원조는 <맛의 달인>과 <미스터 초밥왕>으로 대표되는 일본 만화다. 특히 1983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맛의 달인>은 요리만화의 바이블이란 극찬을 받았고, 허영만이 <식객>을 그리게 된 롤모델이기도 하다. 이 작품들은 단지 맛있는 음식과 유명 음식점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식재료와 연관된 정보와 문화, 음식의 기원 등을 폭넓게 전달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현장 취재와 흥미로운 스토리라인을 갖춘 음식 소재의 만화는 이후 다양한 장르에서 새로운 매력을 더하여 재탄생했다. 말 그대로 원소스 멀티유즈가 구현된 셈이다. 그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일본 영화 <심야식당>과 한국 영화 <리틀 포레스트>다. 두 작품 모두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만들어졌고, 만화를 뛰어넘는 매력을 지녔다는 호평을 받았다.  


2006년 아베 야로가 연재를 시작한 만화 <심야식당>은 영화와 드라마로 여러 나라에서 제작되었다


나는 넷플릭스를 통해 <심야식당: 도쿄스토리> 1편과 2편을 감상했다. 옴니버스 방식의 이 영화는 3개 정도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었는데, 특정 요리와 연관되어 스토리가 전개되고 때로는 서로 연결되기도 한다. 도쿄의 대표적인 환락가인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자정부터 아침 7시까지 운영하는 심야식당에서 벌어지는, 사연 많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간다.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이 귀가를 서두를 무렵,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는 마스터의 멘트로 시작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대학시절 즐겨 가던 닭꼬치 술집을 떠올렸다. <심야식당>과 마찬가지로, 나의 '꼬치집'은 메인 메뉴 이외에도 손님이 먹고 싶은 안주를 마음씨 착한 주인아주머니가 즉석에서 만들어주었다. 남남으로 테이블에 앉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밤이 이슥해지면 어느새 함께 어울려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곤 했다.



2018년 임순례 감독이 만든 <리틀 포레스트>는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가 원작이며 일본에서도 영화화되었다. 시골 내음 가득한 사계절 풍광을 배경으로 젊은 주인공들이 서로의 상처와 좌절을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담백하게 담아냈다. 특히 배추전, 무지개 시루떡, 크렘 브륄레, 밤조림 등을 만드는 과정이 실감 나게 묘사되었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친구들과 함께 먹으며 옛 추억을 공유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김태리와 류준열이 왜 또래 연기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배우인지 확인할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음식 소재 영화 3편은 공교롭게도 한국과 일본, 중국의 문화를 배경으로 제작된 <리틀 포레스트>, <심야식당>, <음식남녀>다. 세계적인 거장 이안 감독이 1994년에 만든 <음식남녀> 역시 음식과 가족, 세대갈등을 흥미롭게 묘사했다. 말초적인 흥밋거리로 제작된 방송 프로그램과 달리, 영화는 음식을 소재로 하되,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낸다. 원작 만화가 어떻게 각색되었는지 비교하는 것도 큰 재미를 안겨준다.    




유럽에서 2년 이상 생활한 경험이 있는 나는 다양한 글로벌 식재료와 조리방법에 익숙한 편이다. 스테이크와 통감자요리를 즐겨먹는 유럽에서는 오븐으로 고기를 익히고 다양한 소스와 향신료를 사용한다. 품질 좋은 밀로 만든 피자나 스파게티를 싱싱한 샐러드와 곁들여 먹으면 훌륭한 한 끼가 완성된다. 나라와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듯이, 좋아하는 음식재료도 제각각이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가 돼지의 어느 부위를 즐겨 먹느냐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80% 이상이 삼겹살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천대받는 돼지 뒷다리가 스페인에서는 하몽이라는 천하별미의 햄으로 변모한다. 소금에 절이고 서늘한 그늘에서 1년 이상 건조와 숙성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하몽은 쫀득쫀득하면서도 질긴 육질을 자랑한다.


20여 년 전, 런던 출장을 가서 워킹 런치를 한 적이 있다. 회의 중 제공된 샌드위치가 일반, 베지테리언, 비건 3종류였다. 채식주의가 생소하던 시절, 이미 유럽에서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식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육식과 채식 중에 어느 것이 좋은가를 놓고 여전히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각자 음식을 선택하는 기준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건강의학적으로나 환경보호의 관점에서 볼 때, 과도한 육류 중심 식사는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의 저명한 당뇨병 전문의 마키타 겐지는 <식사가 잘못됐습니다>라는 책에서, 이른바 '건강격차'를 강조했다. 40세 전후의 직장인 100명 중에서 20퍼센트가 '건강 상류층'이고 나머지 80퍼센트는 안타깝게도 '건강 하류층'인데, 그 이유는 '매일 먹는 식사'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먹는 것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건강을 좌우할 뿐 아니라 업무 성과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한다.


나만의 소울 푸드 황태떡국. 배도 부르고 마음도 힐링되는 최고의 음식이다


음식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은 거기에 나만의 추억과 사랑과 인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누고 싶은 많은 사연들은 훗날 다시 풀기로 하고, 글을 끝내기 전에 나의 소울 푸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나는 '돌박사'라는 식당에서 황태떡국을 주문해 먹는다. 이 집의 메뉴는 황태설렁탕과 떡국 딱 2개다. 진한 육수와 황태살, 쫄깃쫄깃한 떡이 담긴 황태떡국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시키는 당신만의 소울 푸드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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