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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뼘만

by 지영

손은 자판 위에 놓여 있지만 시선은 하얀 화면을 멀꾸미 바라보고 있다. 자판의 위치를 확인이라도 하듯 내려온 시선은 퍼런 힘줄이 돋은 손등에 머문다. 내 손도 늙는구나,

자판 옆의 작은 통엔 클립, 집게, 가방에 있어야 할 립밤까지 들어있었다. 어디서 주워다 놓은 검은 지우개도 섞이지 못한 채 심심하게 서있다.


아침부터 유난스럽게 짜증스러웠지만 어느새 꽉 잡아 누른 마음을 들킬까, 아니 나의 소소한 분노 즉 내 안의 것들이 티격태격하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마음을 다독였을 것이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나를 더 이상 못되고 소심하지 않게 만들려고 이유를 갖다 붙였다.


어린 시절 상처는 무의식을 지배한다. 진흙탕 웅덩이에 지푸라기를 얹어 가려놓거나 꽃으로 가려도 메꾸지 않으면 다시 빠져버린다. 상처 받은 내면 아이는 성숙한 관계 맺기가 어렵다. 유년기의 심리적인 상처 그리고 그것에 대한 치유가 없었거나 이해받지 못한 상흔은 장애물을 넘지 못한다. 마치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 나무와 같다.


나는 항상 멀리 가지 못한다. 생각도 그렇고 관계도 그렇다. 좋은 말로 직관적인 것이지 단순하기 때문에 ‘그저 느껴지는 대로’ 산다. 그런가 하면 ‘지금⋅여기’의 사람들하고 지낸다. 언제나 ‘현재’ 그 언저리에 있다. 나를 둘둘 말고 있는 깊은 불안은 늘 여기에 나를 머물게 한다. 엄마 치맛자락 붙잡듯 ‘지금⋅여기’를 꼭 쥐고 있다.


날더러 ‘어리바리’하다는데, 단세포 아메바처럼 생각까지 깊지 않아 내가 야속하다. 적당히 사람들을 속이고 있지만 ADHD 장애도 충분히 소유하고 있어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그런 내가 요즘 갱년기를 앓기 시작한 것 같다. 어린 상처도 치유하지 못한 채 늙은 상처까지, 그래서인지 자꾸 눈이 감긴다. 잠들 햇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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