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말을 듣지 않으면 저렇게 혼날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가 있었구나’
“요즘에 저렇게 착한 아이가 있을까”
“공부도 잘해”
“5반 부회장이잖아요”
문 닫고 나가는 학생을 두고 둘러앉은 교사들이 한 마디씩 한다.
모두 퇴근하고 아무도 없을 시간이면, 찾아와서 남몰래 상담을 받는 여학생이다. 매일 밤 죽기 위해서 옥상에 올라간다. 죽고 싶지만 다시 계단을 걸어 내려와서는 착한 아이가 된다.
6살인지 7살인지 분명치 않으나 유치원에서 친구를 찾아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를 눕힌 채 두 팔을 잡아 눌러 제압하고 있는 선생님을 봤다. 발버둥을 쳐도 눌린 팔과 다리를 어쩌지 못하고 바닥에 눕혀져 있는 어떤 아이도 봤다. 아이의 무서운 비명을 문틈에서 몰래 봐 버린 것이다.
생각해보면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아이에게 약을 먹이는 모습이었을까... 콩콩콩, 가볍고 명랑한 발걸음이 딱딱하게 굳어져 물러설 수가 없었다. 작은 아이는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웠는데, 그 기억을 잊고 있었는데 문득 알아버렸다.
“그 이후 같아요....... 나도 저렇게 되겠다”
무서운 광경 속의 그 아이처럼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늘 착했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삶이 벅찼던 것이다.
발견만으로 치유가 가능할까?
아이는 변했다. 이제는 자기가 좋아서 공부를 하고 ‘싫어’를 말할 수 있다. 드디어 발그레한 두 볼에 유쾌함도 담겨져 있다. 늘 잘해야 하는, 늘 괜찮아야 하는, 늘 이해하는, 그렇게 늘 어른인 줄 알았던 아이가 사라졌다.
통찰 즉 자기 발견은 그동안의 내 삶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여기까지만 상담자가 도와주어도 내담자는 앞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아이는 상처받은 ‘그날’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의 말을 들어주고, 그 마음을 읽어주고, 위로해주고, 안아서 토닥여주자. 아이는 비로소 편안해진다. 그리고 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