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서정학
자신만만하게 그리기 시작한다. 기분 좋게 시작한다. 그리고 그리다보면 선명함이 조금씩 사라진다. 그리고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점점 슬퍼진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면 그릴 수 없게 된다. 영역을 벗어난다. 다른 것이 되기 전에 대충 수습하곤 하지만 선을 넘으면 그렇게 다른 것이 된다. 당신은 알아챌 수 없다. 그리고 경계는 미묘해서 날 맑을 때는 제법 멀리까지 선명하다. 하지만 고개를 약간만 틀어도 알아볼 수 없다. 그 자리에서 그곳을 봐야 보인다. 언제나 기분좋게 시작하지만 언제나 기분좋게 끝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당신이 보는 것은 경계를 넘지 않은 그런 것입니다. 다른 것들이 아니다. 당신에게 기대 있는, 당신은 내가, 나는 당신이 뭘 보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기대하고 상상하고 그릴 뿐, 내가 상투적인 이유다. 그리고 그리다벼면 그림이 완성된다.
필사10일/ 2022.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