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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Sep 04. 2022

외로움에 관하여

캐럴라인 냅 / 명랑한 은둔자 中

  일요일 아침, 창문으로 햇빛이 새어들고, 새가 노래하고, 계획도 할 일도 없는 하루가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주중 일하는 날들의 터널 끝에서 맞는 여유의 빛이자 기쁨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날이 두렵다. 이런 날 나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깬다. 막연한 갈망, 내 마음의 문을 긁어대는 이름 모를 불안, 아릿한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외로워.


   외로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말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파티에 있을 때 느껴지는 단절의 외로움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찾아드는 그리움의 외로움도 있고, 사람과 접촉하지 않은 채 내리 몇 시간이나 며칠을 보내면 생겨나는 고립의 외로움도 있다. 그런데 내가 제일 잘 아는 외로움은 일요일 오전의 그리움이다. 이것은 종종 사전 경고도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듯한 외로움이다. 일단 이 외로움이 들이닥치면, 이 크나큰 외로움을 극복하기란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기분이 든다. 만약 우리가 가게에서 외로움을 살 수 있다면, 일요일의 외로움은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을 테고 그 위에 이런 딱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취급주의-초강력'.

   

  나는 이 외로움과 오래도록 친밀하게 지내왔다. 가끔은 내가 이 외로움을 타고난 게 아닐까, 나 자신이 남들과 다르거나 뭔가 부족해서 세상과 떨어진 존재라고 강하게 느끼는 이 감정을 타고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릴 때 어느 봄날에 내 방에 앉아서 창밖에서 살랑거리는 나뭇잎들을 보며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이름 붙이지 못했던 어떤 기분을 느꼈던 일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것은 세상에 참여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세상은 저 창밖에서 나 없이 분주히 돌아가고 있는데 나는 거기 참여할 능력이 없거나 의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늘 친구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그것도 많다. 하지만 내가 겪는 외로움은 현실의 상황이나 논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내 안에 산다. 작고 끈질긴 악마 같은 그것은 가장 고요한 순간에, 그러니까 계획 없는 저녁이나 일요일 아침 같은 때 활개를 친다. 그것은 공허감이다.  


  그냥 슬프기만 한 기분이 아니다. 무서운 기분이기도 하다. 내게 외로움은 늘 우울함과 지척에 있는 듯했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뱀이나 거미에 반응하는 것처럼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반응한다. 만약 이 잠깐의 외로움이 너무 오래가도록 -여섯 시간, 하루, 며칠을- 내버려 둔다면 이것이 곪고 커져서 나를 마비시키는 절망감으로 바뀔까 봐 두려운 것이다. 너무 외로워진 상황에서 얼른 빠져나오지 않으면 내가 결국 그 심연에 빠질 것 같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살면서 지금까지 거의 늘 그런 외로움을 앞질러 도망치려고 애썼다. 언제난 분망 하게 지내고, 스케줄을 꽉꽉 채우고, 나쁜 관계에 매달렸다. 술로 외로움을 쫓아내려고 했고, 운동과 쇼핑으로 쫓아내려고 했고, 발작적으로 집 청소에 매달림으로써 박박 씻어서 쫓아내려고 했다. 이 모든 전략은 어느 정도 소용이 있었다 특히 나쁜 남자와 연애하는 것이 그랬다. 집착적인 연애만큼 사람의 얼을 빼놓는 일은 또 없는 데다가, 만약 나쁜 연애 때문에 외롭다면 최소한 그 감정을 남 탓으로 돌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집착하더라도(혹은 술을 마시거나 쇼핑을 하거나 청소기를 돌리더라도) 그 감정을 깨끗이 지워낼 수 없다. 외로움은 늘 돌아온다. 그래서 이제 나는 그것을 적이라기보다는 지인처럼 여기게 되었다. 흔쾌히 환영하진 못하더라도 존중할 필요가 있는 존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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