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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 Sep 06. 2022

올 테면 와 봐라, 내가 질 것 같으냐

버즘나무/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 中

우리나라 가로수 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나무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나무는 바로 플라타너스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넓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한여름의 뙤약볕을 피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여름의 시원한 그늘만 좋은 게 아니다. 가을이면 플라타너스는 노란빛이 도는 따뜻한 갈색의 낙엽을 떨어뜨려 삭막한 도심 거리를 낭만적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어디 길거리뿐일까. 학교 교정에 한두 그루씩 자리 잡은 플라타너스는 도로에서와 달리 가지가 잘릴 일이 없는 탓에 본연의 풍성한 자태를 마음껏 뽐낸다. 


그런데 플라타너스의 우리말 이름이 버즘나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플라타너스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껍질이 벗겨져 허연 속살이 얼룩덜룩 보이는 수피가 얼굴에 피는 버짐(버즘)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40~50년 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 허연 버짐을 달고 사는 아이가 꽤 많았다. 얼굴에 버짐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집안 형편을 가늠하다는 우스갯소리가 떠돌 정도였다. 하고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그런 지저분한 이름을 가져다 붙였느냐는 반발(?)이 늘어서일까. 이제는 플라타너스라는 원명이 훨씬 더 널리 쓰이지만 나는 버즘나무라는 우리말 이름이 더 좋다.


비록 끼니 걱정을 할 만큼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마른버짐이 허옇게 핀 아이들의 얼굴은 늘 밝고 씩씩했다. 자기 먹을 게 부족한 마당에도 아이들은 점심때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친구를 보면 보리밥에 김치뿐이라도 제 도시락을 나눠 먹었다. 형편이 부족해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바로 생업 전선에 뛰어든 친구도 있었지만 그들 역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할까. 그렇게 얼굴에 버짐을 달고 살던 아이들이 자라 오늘날의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략)


우리 눈에 늘 싱그러운 버즘나무의 삶은 보기와 달리 무척 치열하다. 나는 서울에 갈 때마다 지하철역 근처에 자리한 버즘나무 줄기에 가만히 귀를 대 보곤 한다. 그러면 뭔가 웅웅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름 아닌 도심을 통과하는 지하철의 진동소리다. 척박한 환경에 사는 가로수의 운명상 버즘나무는 늘 주변의 변화에 민감하다. 하지만 도심 한가운데에 있으면 하늘 높이 치솟은 건물에 가려 바람의 흐름도, 햇볕의 움직임도 제대로 알아챌 수 없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이 길게 뻗은 뿌리를 통해 주변의 움직임을 느끼는 것이다. 버즘나무의 뿌리들은 얼마 되지 않는 땅속의 흙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 갈수록 더해지는 시련에 맞서 "그래, 올 테면 와 봐라. 내가 질 것 같으냐"하고 항변하듯 말이다. 

 

어느 술집에 가니 그런 문구가 있었다. '날씨야 아무리 추워 보라 내가 옷 사 입나! 술 사 먹지.' 함께 갔던 지인과 맞는 말이라며 껄껄댔는데 버즘나무를 보면 왠지 그 문구가 떠오른다. 비록 줄기 전체에 허연 버짐을 얹고 있지만 열악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항상 씩씩하고 푸르게 살아가는 버즘나무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북한에서는 버즘나무를 방울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낙엽 진 늦은 가을 기다란 끈에 대롱대롱 달린 열매가 방울처럼 귀엽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란다. 만일 통일이 되면 나무는 플라타너스와 버즘나무와 방울나무 중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까. 나는 버즘나무로 불렸으면 좋겠다. 버즘나무에게서 "이깟 어려움쯤 뭐가 대수라고. 조금만 더 힘내서 살아 보자고!" 하는 응원의 말을 늘 듣고 되새기고 싶기 때문이다. 끝.






세계적으로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만만치 않다. 또한 며칠 전부터 막강한 태풍은 우리들에게 잔뜩 겁을 줬다. 수몰된 소(牛)의 겁먹은 표정이 계속 떠오른다. 

     

나는 작은 갈등에도 속상하고 아픈데, 예상치 못한 풍파에 자연 만물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힘을 주고 싶은 마음에 ‘올 테면 와 봐라, 내가 질 것 같으냐’는 글의 제목에 눈이 들어왔나 보다.    

 

그런데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부러지지 않기 위해서, 무참하게 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쓰는 그 과정이 힘들 것을 알기에 마음이 안쓰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먹을 불끈 쥐고 나가야 할 때는 힘을 내야 할 것이다. 모두를 응원한다.(2022.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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