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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기억

by 지영

아침에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 책장에서 책을 읽고 있던 첫째.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셋째는 그 곁에서 책을 마구 흩뜨려 놓고는 발그레한 볼로 웃곤 하던 아침이었다. 엄마가 책을 읽어주면, 세 아이는 그 곁에서 쪼르르 모여 앉아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둘째는 이 장면이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이란다.


‘곰 잡으러 간단다, 큰 곰 잡으러 간단다.’ 반복되는 어구와 의성어는 아이들을 신나게 했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를 펼치면, ‘나 아니야, 내가 왜?’를 이젠 외워서 합창하며 서로 웃었다. 몇 권의 책은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반복해 읽어주었다. 그중 하나가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였다. 책을 통해 나는 아이들에게 늦게까지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아이들 초등학생 때는 대여용 책가방이 유행이었다. 우리 집에도 매주 세 개의 책가방이 배달되었다. 새 책에 대한 환호가 시간이 갈수록 적어지긴 했지만, 배달은 오래되었다. 새로운 책과 교환해야 하는 날인데, 현관 벨소리를 듣는 순간, 반납할 책을 제자리에 담아주지 못했을 때,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렇게 아이들은 책과 함께 자랐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본전은 다 뽑을 수 있겠다는 마음에 책값을 아끼지 않았다. 대신 장난감이나 게임기를 사주지 않았던 것은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일 선물까지 늘 책이었다. 투정 없이 받아 기뻐했으니, 아이들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졌다. 내 취향과 내 생각이 담긴 책이 어쩌면 포장 좋은 잔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를 만날 때, 그래도 혹시 몰라 시집 한 권은 넣고 다닌다. 지하철이나 사람을 기다리는 사이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가방이 가뿐하다. 그리고 누군가와 만났을 때 마음이 동하면 그대로 선물할 수도 있다.

다행히 남편도 책을 좋아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남편이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은 종로서적이다. 왠지 우습지만, 신혼 첫날밤도 우리는 각자 자기 책을 읽고 있었다. 남편의 책장을 보며 몇 번이나 놀랐다. “나도 이 책을 샀는데, 당신도 샀단 말이야!! 오, 책값....” 결혼 후 가장 많이 갔던 곳은 교보문고다. 새로운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꼭 그곳의 교보문고를 찾아간다.


이사를 자주 다녀야 하는 우리에게 책은 늘 고민거리다. 딸을 통해 중고매장에도 몇 차례 보내고, 필요한 사람에게 건네주며 정리하지만, 쉽게 처분할 수 없는 책들은 고스란히 남는다. 책 박스는 생각보다 이삿짐의 부피를 많이 차지한다. 꽂아두면 많아 보이지 않던 책이 막상 짐으로 싸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도 우리 부부의 만남부터 아이를 키우던 시간까지, 책은 우리 가족의 사랑과 추억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우리 부부에게 책 읽기의 문제점이 있다. 나는 시간을 핑계로 생각보다 책을 안 읽는 것이고, 남편은 읽는 책의 장르가 편중되어 있다. 알고 있기 때문에 노력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과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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