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원 에세이 : 6일차 p 89~104
‘잘 걷고 잘 넘어져요’
"한번 다친 발이니까 더 조심스럽고, 또 아플 것 같고 그렇죠? 그래도 왼발에 힘을 실어야 해요. 안 그러면 계속 약해질 거예요. 두려워하지 말고 발을 내딛어요. 괜찮아요. 걸어요. 자꾸 걸어요."
그가 커튼을 닫고 나간 후 다시 혼자 남아 누워 있으면서, 나는 어쩐지 후련하고도 글썽글썽한 기분이 되었다. 발목을 고쳐달라 했더니 마음을 고쳐주고 그래요.(91p)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누군가의 삶을 에워싸고 떠도는 소문들을, 나는 언제나 냉담하게 듣는다. 슈니츨러의 소설 문장을 빌려와 말하자면, "한 인생 전체의 현실조차 바로 그 인간의 가장 내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실의 나열에 솔직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101p)
매일 시를 쓰고, 정원을 가꾸고, 생강빵을 잘 구웠던 에밀리. 집 앞에 찾아온 동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 주고 싶어 창밖으로 바구니를 내려보냈던 에밀리. 고독도 고통도 진실해서 좋다고 말한 에밀리. 자신으로 살기 위해 누구처럼 살기는 거부했던 에밀리.
나는 시인으로 불리기 전, 혼자 튀어서 외로운 캥거루 같았던 그녀의 무명시절을 퍽 사랑한다.(104p)
< 단상 >
나는 소문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굳이 나를 찾아와 전하는 말도 흥얼거리듯 흘려듣는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은 이야기에는 되묻는다.
“네가 직접 본 거야?”
“그 사람한테 직접 들은 거야?”
그렇다. 설사 어떤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한다 해도, 그것이 곧 그 사람의 ‘내적인 진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못 본 척한다. 그래야 했던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의 관계 방식이다.
중학생 무렵부터였던 것 같다. 하얀 도화지 위에, 내가 경험한 그의 모습을 그려 넣듯이.
그렇게 사람을 만나려 애써왔다.
소문은 “누가 그렇다더라”는 말에서 시작해, 끝내 누군가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세상이, 그렇게 아프게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피해자가 되면 고통스러우면서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내 고통은 고통이면서, 남의 고통은 무시된다면 이것보다 더 슬픈 일이 있을까.
그러니 늘, 나부터 돌아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