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캐러라인 냅 / 옮긴이 김명남
1. <필사>
사랑받고 싶은 내 바람이 과하고 비현실적인지, 아니면 정상적이고 건전한지 어떻게 구별할까?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고, 어려운 질문이 늘 그렇듯이 그 해답은 애매하고 개인적인 수준으로만 존재하는 편이다. 나는 엘리자 같은 여성을 보면 자존감의 언어를 떠 올리곤 한다. 그는 자신이 갈망하는 수준의 만족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느끼지 않는 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지 않는 한 그 갈망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저 사랑받기 만을 원한다는 건 사실 내적으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혼자서도 충분히 귀한 존재라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 느낌을 바깥의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뜻할 때가 많다.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자기애든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든 사랑 그 자체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도 잘 안다. 나는 혼자서 진심으로 편안하다고 느낄 때면 마이클의 애정을 덜 필요로 하고, 내면의 쓰라린 허기를 덜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더 애정에 굶주리고 불안정한 상태일 때는 그 갈망이 격화된다. 사랑받는 느낌이란 일종의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그 느낌은 상대와 내게서 절반씩 생겨나야 한다. 사랑은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역동적인 감정이다. 가끔씩 밀려드는 의문과 실망과 애매함의 파도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물결에 반드시 있기 마련이 그 일부다. p81
2. <필사>
나는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아이를 갖는 것, 자신의 욕구와 두려움을 밀어두는 것, 자신에게만 몰두하던 사람이 그 대신 아이처럼 연약한 대상에게 몰두하기로 하는 것은 참으로 용감한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오빠가 겪는 인생 과제들은 대단히 중요한 것만 같고, 내 과제들은 피상적인 것만 같다. p87
우정은 때로 아주 실질적이고 긴요한 것이지만, 여러 관계들 중에서 가장 일시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마모는 자연스럽고 예측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변하고, 각자 자기 갈 길을 간다. p96 어떤 우정은 6년 전에 내가 술을 끊었을 때 내 세계에서 사라졌다. 그 우정들은 술을 마시면서 흉금을 터놓는 긴 저녁 식사를 좋아하는 공통의 취향에서 빚어진 것들이었다. 그런데 와인이 없으니, 이야깃거리가 확 줄어버렸다. 그 밖에도 공통적으로 씨름하는 문제에 바탕을 둔 우정은 술친구의 우정만큼 쉽게 시들곤 한다. (중략) 어떤 우정은 그저 신상이나 환경의 변화를 이겨낼 만큼 역사나 애정이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끝난다. p97
3. <필사>
오늘 운동할까 말까? 운동을 안 해도 기분이 괜찮을까 나태하다고 느껴질까? 나태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하고 강박적이라는 뜻일까? 망할 메뉴 고르기 딜레마도 마찬가지다. 성이 찰까 싶은 그리스 샐러드를 주문하면 잘했다 싶을까 불만스러울까? 불만스럽다면 집에 가서 쿠키 열일곱 개를 먹는 걸로 과잉 보상하게 될까? 과잉 보상하게 되면....
이런 질문들은 거식증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자들에게 좀 더 유의미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질문들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섭식장애가 있든 없든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식의 머릿속 게임을 꽤 자주 겪는다. (P181)
4. <필사>
내가 요즘도 종종 놀라는 점은 거식증과 알코올 중독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둘 다 내 감정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도록 해주는 수단이었고, 각각 감정을 굶겨 죽이거나 술로 씻어내 버리는 방법이었다. 한편 술을 끊은 요즘 내가 쓰는 수단은 예의 그 충동들을 더 건전하게 다룰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더 안전하게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그것을 대면함으로써 나아질 수 있는 전략을 찾아내는 것이다. p221
1. <단상>
사랑에 대한 동화적인 환상, 이라,,, 남녀 간 사랑에 대해서는 내가 좀 무딘 것 같다. 제대로 파헤쳐보지 않아서 그렇거나, 지금의 남편이 내게 잘 맞춰주기 때문에 배불러하는 소리일 수도 있다. 음악을 듣다 딸이 가사처럼 절절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할 때면 철렁한다. 그 엄청난 일을 겪어야 하는 것도 안쓰럽지만, 그런 너를 바라볼 나도 자신이 없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말을 자르곤 한다.
여하튼, 이런 생각과 함께, 나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져 살다 보면 정작 할 일을 하지 못할 까닭에, 사실은 의식적으로 못 본 척 넘기려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이 세상을 살아내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사랑 욕구는 당연히 존재하지만, 그보다 즐거움에 관한 욕구, 즉 자아실현을 위한 가치들에 밀려 후순위에 놓여있을 뿐이지 않겠나 싶다.
유아기로부터 애정적 결핍이나 허기를 경험한다면, 사랑을 더욱 간곡히 갈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얻게 되는 작은 승리로 그 허기를 채울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 결핍 때문에 더욱 간절해질 수도 있다는 양면성 또한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결국 혼자 단단해져야 한다는 쪽으로 기운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조금 더 단단해지려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2. <단상>
어쩌다 띄엄띄엄 연락하던 그녀와 통화를 했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안부를 묻지만, 어제저녁까지 만나 밥을 같이 먹은 양 아무렇지 않다. 같은 분야의 일로 맺은 우정이다. 작가의 말처럼 아주 실질적이고 긴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신상이나 환경의 변화를 굳이 뛰어넘어가며 만나게 되진 않는다. 그래도 늘 서로에게 늘, 그만큼 떨어져 있어도, 거기에 서로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고 편안한 사이다.
한편 ‘마이 베스트 프렌드’라며 호쾌한 허세로 인사하는 친구도 있다. 우정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꺼내기 전에 이미 서로에게 스며들며 친해진 사이. 그런데 그녀가 지금 아프다. 유난을 떨며 가보지 못하는 내가 좀 원망스럽스럽고, 마음 한편이 시리게 자리해 있다. 드러내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깊음을 알지만, 자주 들여다보고 싶은데... 붙는 이유들이 많으니, 미안하다.
3. <단상>
‘아, 운동을 갈까, 말까. 안 가면 근육이 빠질까 두렵고, 가자니 또 가기 싫고, 쉬었다 가면 다시 갔을 때 더 힘이 들고, 계속 가야 하는데 가기는 싫고,,, 갈까, 말까?’ 혼자 묻고 답하며 가야 하는 이유와 가지 않아도 되는 이유 사이에서 매일 혼란스럽다.
이렇게 갈까 말까를 오가며 혼잣말을 하고 있으면, 딸은 엄마가 랩을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다며 웃는다.
학생 때 체육 시간은 기우제를 지낼 만큼 싫어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근육이 유난히 없는 내 물렁살이 원망스럽고, 원망만 하고 있을 수 없어서 운동을 하는데, 정작 운동 가기 전에 고민하는 시간이 더 길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강박적으로 성실하게 운동은 다닌다는 것이다.
“엄마, 일단 가요. 그리고 아무 생각하지 말고 땡겨요.”
아들의 처방은 늘 단순하다.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일단 운동복부터 입는다. 마음이 동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순간에 바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머릿속 실랑이는 곳곳에서 터진다.
그렇다. 늘 고민하고, 갈등하고, 하기 싫다가도 해야 하니 또 움직이고, 또 해내면서, 그렇게 두 마음을 오가면서, 그렇지만 결국은 또 하고, 또 살아낸다. 이 나이까지도 이런 내가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지만...
4. <단상>
중독에 이른 것은 결국, 나약한 자아와 마주함이 두려워 선택한 회피였을 것이다. 그들은 양 주머니 가득, 불안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특정 중독 경험은 없으나, 내 안에는 '강박적 성실함'이라 부를 만한 책임감과 성실이 있다.
중독은 불안과 마주할 용기가 없어 쾌감 속에 숨기 위한 도피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면, 강박은 차라리 수고를 더해가면서 불안을 막기 위한 사전적 통제행동일 것이다.
나의 강박적 성실함 또한 그 속내를 파헤치면 결국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중독의 서사 속에서 나의 강박을 겹쳐보게 된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른 메커니즘으로 작동하지만, 원치 않아도 반복되는 패턴과 불안, 긴장이라는 강한 감정 상태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나를 건강하게 통제하는 방법으로 이제 나를 좀 다독일 줄 안다.
"완벽하지 않아도 돼, 이만하면 충분해, 지금도 훌륭해!"
"때로는 못할 수도 있지, 가끔은 그럴 수도 있어."
5. <단상; 필사 없음>
나와 닮은 구석이 있는 그녀의 솔직함에 뜨끔뜨끔하기도 했고,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기도 하면서 읽었다. 전에도 그녀가 말하는 안경점이야말로 갈등도 없을 것 같고,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주니 의미 있는, 그러나 참 평범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에, 그녀의 발견이 그럴싸하다는 것에 감탄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평범의 즐거움, 평범의 명랑함을 나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안다. 가족 관계를 둘러싼 내가 아니고 오롯이 나로서 인정될 때의 편안함이 내게 그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10월도 그녀와 같다. 절대 옷을 껴입지 않아도 되는, 니트와 가디건 한 장으로 아직까지는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날씨.
의도성이라는 1도 없이 어쩌다 보니 살게 된 이곳에서, 이제는 사소한 반복이 가능하였을 때, 그 하나만으로 다른 곳으로의 이사를 거부하기도.... 대구로 이사 오기 전의 도시에서는 집 앞의 스타벅스와 그 2층의 헬스장, 그리고 그곳의 트레이너 때문에, 두 발을 그곳에 꽉 붙이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던 슬픔도 있었다.
그리고 옷장 기능상실 증후군... 이란, 옷 입을 줄 모르는 내게는 늘 존재하는 것이니, 이건 누구를 탓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가 오늘을 견디고 살아가는 이유는 이 마음의 근육을 키워가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다. 때문에 늘 맘에 들지 않는 나를, 이제는 그대로 인정해 가며 조금 너그럽게 살아가고 있다. 쌓여있는 일들에 책 읽기를 미루거나 대략대략 읽어내는 나를 용서해 가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