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같은 자식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양이처럼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태어난 많은 자식 중 한 '자식'입니다. 큰 틀에서 자식은 부모가 낳은 아이를 그 부모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어린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이란 뜻을 가지고 있죠. '이 자식 보게...?'의 그 자식이기도 합니다. 계속 자식 자식 하니까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요. 지금까지 자식이란 말을 이렇게 많이 써본 적은 처음입니다. 그건 그렇고 왜 고양이처럼 살고 있는 자식이란 설명으로 시작했냐고요?
당신은 어떤 자식인가요?
전 고양이처럼 놀고 싶을 때 놀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타입의 자식입니다. 빈말을 잘 못하기도 하죠. 많은 상황에서 "오빠 성격 반이라도 닮아봐"란 말을 듣습니다. 친화력 좋은 그와 달리 내 공간을 침범하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아서였죠. 친인척을 만날 때면 딸이란 이유로 살갑게 굴어야 했습니다만 이 자식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지(순화시키고 싶었지만 이 단어가 제일 적합하네요) 맘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듯하네요. 현재는 다양한 얼굴을 지닌 자식으로 진화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좋든 싫든 한 여성과 남성의 자식이 됩니다. 선택권은 없죠. 여성은 나를 품어주고 낳아줬으며 남성은 내 유전자에 기여한 후 가정과 여성을 돌봤습니다. 초음파 사진으로만 보던 아이가 빛을 보게 되는 순간부턴 부모가 된 부부와 핏덩이의 스토리가 쓰입니다. '이렇게 컸으면 좋겠다' 란 기대와 함께 태어난 신생아와 한 아이의 삶을 책임져야 한단 부부의 책임감이 만나 또 다른 가정이 만들어지는 거죠. 자식이 처음인 자식과 부모가 처음인 부모는 많은 부분에서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기 이전에 한 개인이며 그 개인은 각자의 성향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성향이 존중되지 않고 있음을 감지하면 이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많은 자식들은 가면을 쓰게 됩니다. 그 시기의 난 '나'이기 이전에 난 누군가의 자식이며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나 평판에 흠 잡히는 행동을 하는 건 용인되지 않음을 말하지 않아도 체득하게 됩니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누군가의 자식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옵니다. 그걸 바로 독립이라 부르죠.
자식임은 변하지 않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독립을 이뤄내는 것입니다. 자식이면서 한 개인인 나를 돌보며 키워나가는 일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 그늘 아래 있던 나를 꺼내오는 일은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을 끊었는데 얼마 즐기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죠. 더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더 놀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놀이공원에서 보낼 것인지 또 다른 세계를 느낄 것인지. 정서적 독립이란 다양한 세계를 경험해보겠다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즐겁지만, 같은 기구만 반복해서 타야 하잖아, 뭐 색다른 거 없을까..' 란 생각이 들 때가 시작점입니다.
몸은 놀이공원에 정신은 꽃밭에 두고 있습니다. 저만의 꽃밭을 일구는 중이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직장이 없으니 걱정을 하시긴 하십니다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 란 마음으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님과 함께. 어릴 적엔 나이 들면 누구나 다 부모가 되는 줄 알았는데 전 아직 먼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