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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묘링 Aug 03. 2021

이 자식의 삶

고양이 같은 자식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양이처럼 살고 있는 이 세상에 태어난 많은 자식 중 한 '자식'입니다. 큰 틀에서 자식은 부모가 낳은 아이를 그 부모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어린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이란 뜻을 가지고 있죠. '이 자식 보게...?'의 그 자식이기도 합니다. 계속 자식 자식 하니까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요. 지금까지 자식이란 말을 이렇게 많이 써본 적은 처음입니다. 그건 그렇고 왜 고양이처럼 살고 있는 자식이란 설명으로 시작했냐고요?


당신은 어떤 자식인가요?


전 고양이처럼 놀고 싶을 때 놀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타입의 자식입니다. 빈말을 잘 못하기도 하죠. 많은 상황에서 "오빠 성격 반이라도 닮아봐"란 말을 듣습니다. 친화력 좋은 그와 달리 내 공간을 침범하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아서였죠. 친인척을 만날 때면 딸이란 이유로 살갑게 굴어야 했습니다만 이 자식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지(순화시키고 싶었지만 이 단어가 제일 적합하네요) 맘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듯하네요. 현재는 다양한 얼굴을 지닌 자식으로 진화했습니다.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것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좋든 싫든 한 여성과 남성의 자식이 됩니다. 선택권은 없죠. 여성은 나를 품어주고 낳아줬으며 남성은 내 유전자에 기여한 후 가정과 여성을 돌봤습니다. 초음파 사진으로만 보던 아이가 빛을 보게 되는 순간부턴 부모가 된 부부와 핏덩이의 스토리가 쓰입니다. '이렇게 컸으면 좋겠다' 란 기대와 함께 태어난 신생아와 한 아이의 삶을 책임져야 한단 부부의 책임감이 만나 또 다른 가정이 만들어지는 거죠. 자식이 처음인 자식과 부모가 처음인 부모는 많은 부분에서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기 이전에 한 개인이며 그 개인은 각자의 성향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성향이 존중되지 않고 있음을 감지하면 이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수많은 자식들은 가면을 쓰게 됩니다. 그 시기의 난 '나'이기 이전에 난 누군가의 자식이며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나 평판에 흠 잡히는 행동을 하는 건 용인되지 않음을 말하지 않아도 체득하게 됩니다. 일정 시기가 지나면 누군가의 자식에서 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이 옵니다. 그걸 바로 독립이라 부르죠.


독립했지만 독립할 수 없습니다.

자식임은 변하지 않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독립을 이뤄내는 것입니다. 자식이면서 한 개인인 나를 돌보며 키워나가는 일은 생각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부모님 그늘 아래 있던 나를 꺼내오는 일은 놀이동산 자유이용권을 끊었는데 얼마 즐기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죠. 더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더 놀 수 있습니다. 선택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놀이공원에서 보낼 것인지 또 다른 세계를 느낄 것인지. 정서적 독립이란 다양한 세계를 경험해보겠다 다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즐겁지만, 같은 기구만 반복해서 타야 하잖아, 뭐 색다른 거 없을까..' 란 생각이 들 때가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저란 자식은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요?

몸은 놀이공원에 정신은 꽃밭에 두고 있습니다. 저만의 꽃밭을 일구는 중이라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직장이 없으니 걱정을 하시긴 하십니다만, 어련히 알아서 하겠어 란 마음으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님과 함께. 어릴 적엔 나이 들면 누구나 다 부모가 되는 줄 알았는데 전 아직 먼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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