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설 속에는 기린(麒麟)이라는 상상의 동물이 등장한다. 용과 사슴, 소와 말의 특징이 뒤섞인 형상으로, 평화롭고 번성하는 시대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전해진다. 설명만 들으면 위엄이 느껴지지만, 위압감보다는 생동감이 앞선다. 수사자처럼 흘러내리는 갈기, 날렵한 다리와 유연한 몸통의 선은 고구려 벽화 속 수렵도의 말을 연상시킨다.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에서, 동아시아 전통 회화 특유의 동세와 미감이 배어난다.
기린의 외형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생명력과 불의 기운, 길상을 뜻하는 붉은색은 온몸이 아니라 무당개구리처럼 배 부분에만 드러난다. 이마 한가운데 솟은 단 하나의 뿔은 서양의 유니콘을 떠올리게 한다. 문화권은 다르지만 ‘하나의 뿔’을 지닌 신성한 형상은 순수함이나 보호, 예언, 왕권을 상징한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도깨비의 뿔이 그렇듯, 어떤 문화에서는 질서보다는 힘과 변덕,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차이를 감안해도 기린과 용, 유니콘은 닮은 이웃사촌처럼 읽힌다. 한국에서 이런 혼합형 신수를 떠올리자면 해태(獬豸)가 있다. 사자와 용, 여러 동물의 요소가 뒤섞인 형상으로 정의를 지키고 악을 물리친다는 점에서 기린과도 닮았다. 해태 역시 이마에 하나의 뿔이 있다.
전설 속 동물 기린은 뜻밖에도 일본의 맥주 브랜드에서 가장 친숙한 얼굴이다. Kirin Beer는 1888년 첫 출시 때부터 기린을 이름과 상징으로 삼았고, 이듬해에는 질주하는 기린을 그린 로고를 내놓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상품에 신화나 민속적 형상을 캐릭터로 활용하는 흐름이 있었고, 에비스와 함께 기린 역시 시대적 감각 위에 자리 잡았다. 색감과 장식, 몸짓은 지금 보아도 꽤 공들여 디자인되어 있어, 가볍게 지나치려 해도 자꾸 눈길이 간다.
맥주 라벨 속 기린은 질주하는 동세와 붉은 배의 상징성, 유려한 선의 감각이 오늘날의 브랜드 경험까지 이어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기린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박물관이나 도감이 아니라, 별생각 없이 마시던 캔맥주였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