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에 새겨진 시간

by 도간


​어릴 때 나는 아담한 단독주택에 살았다. 대문 기둥에는 문패 하나가 걸려 있었다. 편지봉투만 한 세로 목패였다. 짙은 갈색으로 옻칠한 바탕에, 한글로 쓴 아버지 이름이 검은 손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주변의 문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목을 그대로 쓰기도 했고, 옻칠한 목재를 쓰기도 했다. 검게 칠한 바탕에 자개를 박아 이름을 새긴 집도 있었다. 크기는 작았지만, 문패가 주는 무게는 컸다. 누구의 집인지, 경계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알리는 표식이었다.


나무에 이름을 새겨 거는 일이 그렇게 묵직한 의미를 지닌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그 감각을 훗날 일본의 어느 골목에서 다시 마주했다.



교토의 골목 곳곳에는 나무로 만든 간판이 걸려 있다. 간판보다 먼저 나무의 질감이 시선을 붙잡는다. 나무에는 옹이가 드러나 있고 결은 반듯하지 않다. 칠을 덜한 표면은 햇빛과 비를 맞으며 거칠어졌다. 나무 둥치의 실루엣이 그대로 살아 있어, 간판이라기보다 나뭇조각이 걸린 듯하다.



자연석으로 만든 간판도 종종 눈에 띈다. 산이나 강에서 그대로 옮겨온 듯 다듬지 않은 화강암과 같은 돌이다. 매끈하지 않은 표면에 글자를 새겼다. 결은 제각각이고 가장자리도 고르지 않다. 글자는 반듯하게 정렬되지 않고 고르지 않은 면까지 간판 일부가 된다. 빗물과 바람을 오래 맞은 돌에는 시간의 얼룩이 얇게 내려앉아 있다. 간판이라기보다 작은 돌 하나가 이름을 품고 있는 듯하다.



원목 간판은 처음에는 밝은색을 띠지만 햇빛과 비를 맞으며 차츰 깊은 색으로 변한다. 삼나무나 느티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가 많아, 옹이가 있는 부분은 변색이 더디고, 마른 결이나 갈라진 틈에는 먼지가 얇게 쌓여 잔 선을 남긴다. 인위적으로 채색한 간판과 달리 바람과 습도에 따라 빛깔이 조금씩 달라진다. 그렇게 쌓인 작은 차이들이 어느새 표정을 만든다. 색은 깊어지고 표면은 한결 부드러워진다. 겉은 소박하지만, 시간의 흔적은 또렷이 남는다.



자연석 간판은 변화가 더디지만 분명하다. 비가 온 뒤에는 색이 짙어지고, 건조한 날에는 다시 바래며 그 흔적이 표면에 얇은 얼룩처럼 남는다. 손끝으로 문지르면 거칠고 서걱서걱한 표면이 글자의 선을 따라 손끝에 느껴진다. 돌에 문자를 새기기도 하지만 금속 글자를 얹어 고정한 방식도 많다. 글자가 돌을 지배하기보다 돌이 먼저 있고 글자는 그 위에 조용히 얹힌 듯하다. 간판은 새것처럼 빛나기보다 골목의 풍경 속으로 스며든다.



나무와 돌로 빚은 간판들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시간이 꽤 배었구나 하고 지나치지만, 자세히 보면 결이 한 방향으로 닳아 있고 자주 비를 맞은 면과 그늘진 면이 서로 다른 색으로 남아 있다. 나무의 결과 돌의 표면은 오랜 시간 같은 방향의 바람과 비를 받아 온 흔적을 드러낸다. 관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남겨 둔 차이다.



이 풍경은 특별한 관광지나 전통 거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의 가게들에서도 그런 간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오래전부터 같은 간판을 사용해 온 가게도 있고, 최근 문을 연 가게들 가운데에서도 원목이나 자연석 간판을 내건다. 거리에는 서로 다른 시기에 달린 원목 간판과 입구 앞에 놓인 자연석 간판이 남아 있다. 시간이 그 위에 겹겹이 스며들면서 거리의 색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간판은 가게를 알리면서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머물며 거리의 분위기를 조금씩 바꿔 왔다. 별다른 연출 없이 시간과 날씨, 바람이 천천히 거리의 색을 만들어 왔다.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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