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산을 찾는 이유

산의 시간

by 한현경

묵언수행 하듯이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을 때 산은 훌륭한 선택이지만, 인적이 드물다는 환경적 특성 때문에 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체로 쉽게 말을 건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 등산 예절이기도 하고. 같은 방향을 비슷한 속도로 걷는 이와 만나면 산을 화젯거리로 짧은 대화를 이어가는 일도 더러 생긴다. 내 경우에는 젊은, 여자, 혼자라는 특수성이 붙어서 뭇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는 것도 한몫한다. 수렴동 대피소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뒤따라오는 걸음 빠른 분들에게 길을 양보하다가 한 여성분이 말을 걸어왔다. 경험상 중년 이상의 여성들은 낯선 이와의 한담에 거침이 없으며 친화력 또한 다른 성별과 연령군에 비해 월등히 높다.


어디까지 가요? 소청까지 갑니다. 아유, 빨리 가야겠네. 근데 왜 혼자 왔어요? 혼자 다니는 게 좋아서요. 아이고, 우리 딸이랑 똑같네~ 걔는 해외여행도 혼자 다닌다니까. 전에는 나랑 백두산 한 번 갔는데 그 뒤로 산은 질색이래요. 아가씨는 산을 몇 년이나 탔어요? 자주 다니지는 않고요, 어릴 적부터 조금씩 다녔어요. 선생님은 어디까지 가세요? 우린 수렴동까지 가서 원점 회귀해요. 다음에는 공룡능선을 꼭 타봐요. 경치가 그렇게 좋다니까 글쎄. 그리고 그, 원래는 못 올라가는 곳 있는데, 어디더라…. 용아장성이요? 맞아요, 용아장성. 거긴 원래 못 가는데 진짜 산꾼들만 타는 곳이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체로 과묵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처럼 속사포를 쏟아내는 일흔의 산객과 동행하기를 십여 분, 수렴동 대피소에 도착해 그녀와 인사를 하고 나는 얼려온 에너지 음료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홀로 산을 찾는 이유는 온전히 혼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도시의 익숙함 속에서는 혼자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 당신은 하루에 몇 번이나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와 같이 시간을 보낼 때도 잠시나마 빈틈이 생기면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확인해야 할 것이 없는데도!-관심과 집중을 교란하는 유혹이 무한히 이어진다. 방 안에 홀로 있어도 마찬가지다. 손길 한 번이면 정신은 사이버 구천의 망령이 되어 떠돈다. 산에서는 그 몹쓸 습관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건 지도와 GPS로 위치를 확인할 때뿐이다. 너무 많고 얕은 연결과 관심이 없어도 떠먹여 지는 과잉 정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홀로 산을 누비는 동안에는 불필요한 말을 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다. 정적 속에서 나뭇잎 부대끼는 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이름 모를 산새들의 기척을 듣다 보면 번잡했던 머릿속이 이른 새벽의 호수처럼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고독을 자처할 때 도리어 가장 외롭지 않다니 재미있지 않은가?


커다란 바위로 가득한 너덜 길과 폭포 몇 개를 지났다. 산행을 시작한 지 4시간이 넘어가자, 슬슬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듯했다. 이제는 마주치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기암괴석의 깎아지르는 절벽이 거대한 성채처럼 드리워지고, 깊은 협곡 특유의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괜히 걸음을 재촉하게 되는 구간도 지난다. 문득 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니, 한낮인데도 주변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크게 의식하지 않더라도 산속에서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지는 각종 새며 풀벌레의 소리가 마치 음소거라도 한 것처럼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질적인 적막을 의식하자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야간 등산에도 느낀 적 없던 두려움이 솟아나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분이 점점 가라앉고 이상해져서 눈앞의 적당한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지쳤다. 오늘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해야 하고, 이곳에서 나를 챙길 사람은 나뿐이므로 생각이 없더라도 간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기로 했다. 육포와 견과류를 씹으면서 쉬고 있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이런 곳에서 어두침침하게 흐리거나 비라도 내렸더라면 훨씬 더 스산했을 것 같아 팔에 소름이 돋았다. 날이 맑아서 망정이었다.


장거리 산행 중에는 드문드문 나타나는 표지판이 반갑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왔는지,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거리 정보를 알려주는 동시에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보장과 안심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봉정암까지 0.5km. 달려가면 3분이면 닿는 거리다. 물론 평지일 때의 이야기지만. 산에서는 일상의 수평적인 거리감이 통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귀여운 숫자는 이 고통이 곧 끝난다는 희망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표지판 아래에 붙은 흰 명판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깔딱 고개. 그리고 그 아래 세로로 쓰인…. 해탈 고개. 다른 길은 없다. 물론, 돌아갈 수도 없다. 큰 돌 위에 걸터앉아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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