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시간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가 이토록 눈물겹게 반가울 일인가. 아침 기온이 영상권에 머물 무렵부터 먼지의 나날이 시작됐다. 날씨 예보는 찌푸린 빨간 얼굴로 먼지 농도가 심각하다며 외출을 나무라고, 핑계와 합당한 보류가 뒤섞여 무력한 초봄. 서울의 봄 풍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애석하게도 꽃이 아니라 돌고래의 피부색에 물을 많이 섞은 듯한 뿌연 하늘이다. 만개한 벚꽃도 희뿌연 하늘 아래에선 몸을 감추고 존재감이 옅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송이송이 하이얗게. 1년 중 오직 이 시기에만 아주 강렬하게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벚나무 가지 사이로 어떤 방해도 없이 솔직하게 내리쬐는 이른 아침의 햇살이 일터로 나가는 발길을 붙잡았다. 식물이 역광을 만나면 그 얇은 표피가 얼마나 부드럽고 투명한지 똑똑히 보인다. 봄꽃은 그렇게 사람을 흔든다. 쉽사리 거절할 수 없는 소담한 손길로 이리 오라고 유혹한다. 나는 기꺼이 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산은 참 신기하지. 도로가 끝나고 숲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분명하게 공기가 달라지니 말이야. 엊그제 내린 비를 머금은 두터운 낙엽과 흙냄새가 먼저 반긴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산길로 향할 때, 걸음마다 감사로 가득하다. 하늘이 푸르러서, 공기가 깨끗해서, 바람에 흔들리는 꽃이 생생해서. 지금 이 순간에 머물 수 있음에. 신록이 시작되기 직전의 전주곡은 거의 소리가 없다. 라벨의 볼레로처럼. 한 겹씩 층을 쌓으며 크고 복잡해질 것을 예고한다.
능선을 타고 출근하고 있으니, 뒷산을 넘어서 하교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개나리 다음 진달래, 곧이어 온 산을 뒤덮던 아까시나무꽃의 농밀한 향기…. 그 꽃으로 벌을 치던 양봉장 가까이 지나가면 벌들이 웅성였다. 산은 이렇듯 느닷없이 과거를 불러와 현재와 잇는다. 도봉산과 북한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다가 떠올렸다. 나는 산이 가까이 있지 않은 삶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 동북부에서 보낸 내게 산이 있는 풍경은 당연하게, 언제나 생활 뒤편에 병풍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잠시 멀리 떠났다가 돌아올 때도 도봉산 신선대의 흰 바위들에 시선을 보내며 집에 돌아왔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산자락에 예찬을 쏟아내고 싶은 심정도 갑작스럽지는 않다. 그것은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애정과 존재의 귀함을 느끼지 못하고 싫증을 내다가 첫 기억 속 부모의 나이가 될 즈음이면 부모를 찾고 싶고 애달파하는 마음을 닮았다.
오를 때는 몸에도 열이 오르고 발로 땅을 박찰 때의 압력과 땅의 기운이 머리끝까지 전해져 갖은 생각들이 계곡의 낙수처럼 흐른다. 내려갈 때는 산등성이를 타고 불어오는 찬 바람에 오르면서 데워진 몸이 식으며 차분하고 조심스러워진다. 에너지의 상승과 하강, 유한과 무한, 이치의 순환, 그 모든 것들이 책상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몸을 관통하는 실재로 느껴진다. 그러니 산을 찾는 건 내 나름의 정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언어에 질식할 것 같을 때도, 단순명료하게 계절의 향취를 즐기고 싶을 때도 모두 올바른 방향이니.